껍데기만 부자들의 고단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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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25면

물론 ‘삶이 부자인 사람이 진정한 사치를 누린다’는 명제는 옳다. 중진국의 잘나가는 요리사가 부패한 후진국의 대통령보다 더 행복해 보이니까.

이충걸의 네버 엔딩 스타일

하지만 때론 나도 세일하지 않는 숍에서 아무 갈등 없이 쇼핑 한번 하고 싶다. 조절할 수 없을 만큼 돈이 많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고도 싶다. 하지만 실은 부자가 되긴 참 쉽다. 겉만 부자처럼 보이는 것 말이다.

‘겉만 부자’들도 삶의 목적이나 방식은 부자다. 그들은 말도 부자처럼 하는 데다 취향의 종류, 여가를 보내는 방식까지 비슷하다. 그들은 ‘부티’ 나지만, 부자는 아니다. 늘 최신 경향이 주는 물결에 휩쓸리는, 공작처럼 화려하고 싶은 사람들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벌이가 생각보다 적다는 걸 잘 모른다. 그들의 꿈은 언젠가 진짜 부자 대열에 끼는 것이다. 그게 안 되면 ‘적당한’ 부자라도 되거나.
그들에겐 집은 중요하지 않다. 사실 월세나 사글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든 만남은 밖에서 가진다.

그들의 ‘꼬라지’를 짐작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집에 들여놓아 자존심 구길 순 없는 노릇이니까. 차만은 외제를 타야 한다. 중고여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스타일. 국산차를 탈 거면 아예 걷는 게 낫다.

그들은 아주 사교적이다. 가십과 잡학과 센스는 어디서든 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들은 어떤 사람을 알고 있느냐가 요즘 부자의 기준이란 걸 잘 안다.

그래서 적당히 돈 있고, 적당히 명망 있는 다수의 친구들을 거느린다. 수첩에 적힌 별의별 행사나 각종 약속, 이름도 셀 수 없는 숱한 친구들의 생일은 그들 사회 활동의 기록이자 증거다.

그들은 때로 주변의 부자 친구들이 늘 친하게 대해주는 것에 보답하기 위해 자기도 깜짝 놀랄 짓을 저지른다. 턱없이 비싼 감사의 선물을(물론 할부로) 하는 것이다.
‘겉만 부자’ 들은 진짜 부자들이 무엇을, 언제, 어떻게, 어디서 쇼핑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래서 스타일ㆍ브랜드ㆍ음식ㆍ자동차ㆍ식기ㆍ가구ㆍ미술을 망라하는 부자들의 몇 가지 실루엣을 잘 섭렵해 두었다.

그들 중 남자들은 수트나 가방·시계 같은 핵심 아이템 한두 개에만 전력투구함으로써 부자들과 표나지 않게 섞인다. 여자들은 패션에 들이는 돈을 깎는 데 도가 텄다. 패밀리 세일을 귀신같이 알아내거나 알음알음 할인받을 통로를 숱하게 확보해 두었다.

그들은 휴가를 보낼 때도 최대치의 가치를 짜낼 줄 안다. 결국 부자들과 똑같은 장소에 다다르는 것이다. 방법은 약간 다르다.

그들은 마일리지로 구한 비행기 티켓으로 이코노미석을 타고 파리로 간다. 친구 집에서 묵을 거니까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은 언감생심, 그러곤 세일 매장을 이 잡듯 샅샅이 뒤진다. 서울로 돌아오고 나면 어쨌든 여름 휴가를 호사스럽게 파리에서 보낸 셈이다.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곳을 다 가본 척하진 않는다.

진짜 부자 친구들에겐 결코! 그들은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안다. 그게 부자들과의 상징적인 우정을 유지하는 비결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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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의 편집장 이충걸씨는 에세이집『어느 날 엄마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슬픔의 냄새』등을 펴내고 박정자의 모노 드라마 ‘11월의 왈츠’를 쓴 전방위 문화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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