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에 100% 복무하는 그 단순함의 미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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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31면

美 군용 수통 컵 

대한민국 남자는 신의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군 복무를 마쳐야 한다. 군대 경험은 세월이 흐를수록 아련한 추억으로 미화되게 마련이다.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게 하는 강렬한 단초인 졸병 시절의 에피소드는 각자 어떤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을까?

윤광준에 생활 명품 이야기 - 美 군용 수통 컵

밀리터리 룩과 서바이벌 게임이 유행한다. 군 생활의 향수란 공감대가 깔려 있을 것이다. 난 병정놀이는 좋아하지 않지만 군용품에는 관심이 많다. 극한상황에 놓일 가능성을 생각해 만든 물품들엔 인류 역사를 통해 터득한 온갖 지혜들이 담겨 있다. 지혜의 핵심은 ‘단순한 것이 최고’라는 믿음이다. 군더더기 없는 기능의 완결, 내가 군용품을 좋아하는 이유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 군용품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있다. 군용품의 가치는 현실생활에서 외려 빛나게 마련이다.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 주변의 밀리터리 숍은 내가 아는 범위에서 최고의 군용품 집결지다. 여기서 사들인 여러 물건은 아웃도어 라이프의 요긴한 동반자로 활약한다.

활용 빈도가 높은 미군용 수통 컵이 있다. 원래 수통과 한 세트이지만 수통을 사용할 일은 거의 없으므로 컵만 사용하게 된다. 무게를 최소화한 무광택 스테인리스 스틸의 재질감과 강도는 일품이다.

무게를 줄이려면 알루미늄 재질이 더 낫다는 입빠른 소리를 하고 싶을 것이다.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머릿속의 공상이다.

야전에서 뒹굴며 사용해야 하는 용도를 생각하면 알루미늄은 너무 무르다. 찌그러져 빠지지 않는 컵은 무용지물이 된다. 만든 사람은 실전의 경험으로 터득한 적용의 우선순위를 멋지게 마무리해 놓았다. 군용품은 언제 어디서든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인간의 목숨보다 우선되는 가치는 없기 때문이다.

난 여러 나라의 수통 가운데 미군용을 최고로 친다. 완벽한 기능과 어우러진 날렵한 디자인, 얄밉도록 정교한 비례의 안정감은 그 자체의 조형미만으로 우뚝하다. 좋은 물건은 시간이 지나도 존재의 의미가 약화되지 않는다. 수통 컵을 여러 개 사서 물건을 담아두거나 꽃병으로 사용하는 이유를 의아하게 생각하지 말 일이다. 네오 클래식(Neo Classic)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남자의 애정표현 방법이다.

안락함과 거리가 먼 나의 여행에서 이 수통 컵은 위력을 발휘한다. 아침에는 물을 담아 이를 닦는다. 점심시간엔 라면을 끓이는 냄비가 된다. 작업을 위해 모래를 퍼내야 할 땐 부삽으로 변신한다. 늦은 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게 해주는 역할도 그의 몫이다. 간단한 도구의 활용으로 비(非)일상의 하루는 여유롭다.

제조시기에 따라 수통 컵의 손잡이 디자인이 각각 다르다. 난 플라스틱 수통이 보급되기 직전 만들어진, 후기의 손잡이가 철사로 된 디자인을 가장 좋아한다. 남대문 시장을 뒤지면 상태 좋은 수통 컵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쓰임새를 찾는 일은 각자의 상상력이니 마음껏 발휘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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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 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 마니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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