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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議, 정부ㆍ노조에 쓴소리해 급부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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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14면

“경제단체를 나열할 때는 대한상공회의소를 맨 앞에 써야 한다. 예산 규모나 회원 수, 역사로 보면 상공회의소가 국내 경제 5단체 중 맨 앞인데 왜 항상 전경련 뒤에 세우는 것이냐. 가나다순으로 해도 상의가 전경련보다 앞이다.”

다른 경제단체는 #2005년 박용성 회장 퇴임 전까지‘재계 대변자’자임 #… 경제 5단체 모두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2000년 5월 대한상공회의소 17대 회장으로 선출된 당시 박용성(두산그룹) 회장의 취임 일성이었다. 첫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아닌 같은 경제단체를 향해 포문을 연 것이다. 전경련과 함께 한국의 재계를 양분하고 있는 상의의 자존심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상의는 상공회의소법에 기반을 둔 법정단체다. 연간 매출이 200억원 이상인 기업은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까지 아우르는 덕에 회원사 수만 5만여 개에 이른다. 반면 대기업 중심의 임의단체인 전경련의 회원사는 380여개 사다. 두 단체 간 연륜의 차이도 그 규모만큼이나 크다. 1884년 한성상업회의소로 출발한 상의는 123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역사가 가장 오래된 두산그룹이 상의와 오랜 인연을 맺어 온 데도 이런 배경이 있다.

하지만 상의가 전경련에 미치지 못하는 게 한 가지 있다. 바로 회장단의 무게다. 전경련 회장단은 사실상 대한민국 재계의 대표선수들이다. 역대 정부도 전경련을 주요 파트너로 삼고 한정된 자원을 대기업에 집중시키는 전략을 선택했다. 전경련이 상의를 제치고 재계의 맏형 대접을 받은 이유다.

그러나 박용성 회장의 취임 시점부터 분위기가 급변했다. 전경련은 김우중 회장이 낙마하고 재벌에 대한 정권의 시선도 싸늘해졌을 때다. 상의는 ‘재계의 대변자’ 역을 자임했다. 전경련 회장들이 정부의 눈치를 보며 숨죽일 때도 박용성 회장의 쓴소리는 거침이 없었다. “한국 정부는 ‘보이는 손’을 넘어선 ‘유비쿼터스(어디에나 있는) 손’”이라며 규제 남발을 꼬집었다.

노동조합을 향해서는 “떼로 몰려와 떼를 쓰는 것은 떼 법”이라고 일갈했다. 2005년 박 회장이 세계 155개국 상의의 연합체인 국제상업회의소(ICC) 회장에 취임하자 대한상의의 위상은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그는 두산그룹 ‘형제의 난’ 여파로 결국 중도 하차했다.

얄궂은 운명일까. 현재 상의도 라이벌인 전경련과 마찬가지로 전환기에 직면했다. 상의를 국내 최대 경제단체로 만든 의무 가입 조항이 폐지될 운명이기 때문이다. 원래 폐지 시점은 올해였지만 지난해 말 법 개정을 통해 간신히 시한을 4년 늦췄다.
국내의 경제 5단체에는 전경련과 대한상의 외에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한국무역협회(무협), 중소기업중앙회(중기중앙회)가 있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다는 것이다.

중기중앙회장은 5단체의 장 중에서도 노른자위로 꼽힌다. 그도 그럴 것이 중소기업 출신이지만 굴지의 대기업 단체와 함께 재계를 대표하는 자리다. 이런 상징성 덕에 정치권의 ‘러브콜’도 이어져 박상규·박상희씨 등 회장 출신 인사들이 잇따라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회장 선출 방식도 다른 단체와 달리 직선제다. 자연히 선거가 과열됐다.

“중기중앙회 선거가 시작되면 여의도 전체가 들썩거린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금품ㆍ향응이 판을 쳤다. 전임 회장을 뽑았던 2004년에는 당선자를 비롯해 6명의 전체 후보자가 경찰에 입건돼 수사받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최근에는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다. 2월 28일 회장 선거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위탁해 45년 역사상 가장 깨끗한 선거를 치렀다.

특히 이날 패배한 후보들이 당선자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는 모습까지 연출해 눈길을 끌었다. 중기중앙회를 변모시킨 것은 환경의 변화였다. 보호 위주의 중소기업 정책 흐름이 경쟁 구도로 바뀌면서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공감대가 싹텄다. 정부가 물품을 구매할 때 경쟁 없이 중기중앙회와 단체 수의계약제를 체결하는 제도가 올해부터 폐지됐다.

무협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지난해 회장단이 내정한 이희범 전 산자부 장관에 대해 중소 회원사들이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관료 출신 회장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비슷비슷한 단체가 너무 많다는 지적도 있다. 김재철 전 무협 회장은 재임 때 “경제단체가 많아 재계의 의견 수렴이 되지 않고 있다”며 통합론을 지지했다. 2002년 게이단렌과 닛케이렌을 통합한 일본을 따라 비슷한 성격인 전경련과 경총을 통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전경련과 상의를 통합하라는 목소리도 있다. 전경련 고위직을 거친 한 인사는 “중소기업 중심인 상의와 전경련의 역할은 다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그도 “경제단체들이 위기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인정했다. “시대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개혁을 늦춰온 결과”라는 것이다.

비단 전경련뿐이 아니다. 실제로 상당수 기업 관계자는 경제단체들이 회원사의 변화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세계화의 도전 속에 기업들은 급속히 글로벌화하며 변신을 거듭하고 있지만 경제단체는 여전히 과거 개발연대에 머무르고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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