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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수결 위조 규명 이태진 규장각관장(일요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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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역사는 숨겨지지 않는다”/규장각책 몇권인지 아직 몰라/늦었지만 일제사 다시 써야죠
서울대 부속기관인 규장각은 고도서 17만여책,고문서 5만여건,목판 1만7천여장 등 모두 25만여점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민족문화의 보고다.
비변사등록 등 국보 3점을 포함,수많은 희귀본을 소장하고 있는 이곳에선 심심치 않게 새로운 사료나 이를 바탕으로 한 새 사실들이 발견되고 있다. 구한말 일제와 체결한 을사조약·정미7조약 등에 순종의 위임과 추인이 없어 국제법상 조약의 효력이 없었다는 점이나 순종의 수결(서명)중 일부가 자필이 아닌 위조라는 점도 이곳에서 밝혀졌다.
지난 88년부터 4년째 규장각을 맡고 있는 이태진관장(49·국사학)으로부터 이 발견과 관련된 후속과제,규장각 자료의 정리현황 등을 들어보았다.
­지난 11일 발표한 을사조약의 무효나 순종 수결의 위조 등은 국사교과서를 고쳐 써야 할 큰 사건으로 보입니다.
▲을사조약 문서에는 양국 최고주권자인 고종황제나 일본국왕의 조약체결권 위임장도 없고 사후 날인도 없으니 조약 자체가 무효입니다.
일제의 한반도 침탈과정이 절차상의 형식적 합법성은 갖춰온 것으로 기술해왔던 국사교과서 등을 고쳐 써야겠지요.
예를 들면 일제가 1909년 청과 체결한 간도협약도 효력을 잃게 됩니다.
일제는 러일전쟁 승리의 자만심으로 외교의 형식적 절차도 무시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국제법·사회사 등 각 분야를 전공한 학자들의 공동연구로 정리돼야 할 문제입니다.
­손종의 수결 위조는 확인이 끝났다고 볼 수 있습니까.
▲수결 진본과 다른 점이 육안으로도 확연히 구분됩니다.
서지학의 위조 필적 감정법을 이용하면 더 과학적인 증거도 확보할 수 있을텐데 우리나라에는 시설이 없습니다. 붓에 힘을 주는 필압에 따라 먹이 번지는 정도도 사람마다 각각 달라지는 점을 이용한 마젠타 염색촬영법이란 감정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위조는 누구의 소행일까요.
▲서명으로 사용한 척이란 순종의 이름입니다.
유교사회에서 신하들이 감히 황제의 이름을 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측에서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번의 새로운 발견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후속작업이 필요하겠군요.
▲역사학계의 뜻을 모아 이 자료를 중심으로한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각 분야 전문가들의 논문으로 정리가 돼야겠지요.
­처음 발표됐을때 우리 국사학계는 여태껏 이런 것도 모르고 있었나 하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일제에 침탈돼가는 어두운 부분은 연구할 신명이 나지 않고,따라서 인기도 없는 분야인 탓도 있습니다.
독립운동사에 주로 몰려있고 젊은 학자들은 민중사 연구에 매달려 있지요.
­학문의 유행을 지적하시는군요.
▲일본의 경우를 보면 생색 안나는 분야에도 많은 학자들이 조용히 연구를 계속해서 자료를 축적해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몇개 영역에만 집중될 것이 아니라 역사의 각 분야가 고르게 연구돼야 합니다.
­그러려면 학계에서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규장각 자료부터 제대로 정리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입니다. 규장각 도서의 총목록은 있지만 그나마 일제때 4∼5책을 묶어 하나의 표지와 제목아래 철해놓은 것도 상당수 있으니까 숫자조차 모두 파악됐다고 볼 수 없습니다. 무엇에 관한 책이라는 해제가 만들어진 것은 80%에 불과합니다. 해제가 안된 것은 특히 개항이후 근대관계 자료들이 대부분입니다.
조선왕조때 규장각에서는 도서들을 대부분 책으로 바로 낼 수 있도록 정리·편집을 해왔습니다.
그러다 나라가 망하고 나니 아무도 자료를 정리할 기회를 갖지 못한 거지요.
해방후에도 정부에서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대학도 그동안 데모 막는데 더 신경을 썼던 것이 사실입니다.
규장각 자료중 자체 출판된 것은 『일성록』영인본 29책,초서를 해서로 바꾼 『고문서』7책,『통원사 등록』6책,그리고 이달에 펴낸 『근대법령 자료집』 3책밖에 없습니다.
정리할 자료는 태산 같은데 인력이 태부족입니다.
­그래도 90년엔 도서관 산하 규장각 도서관리실이 지금의 신축건물로 이전했고 지난 3월엔 독립기관으로 승격되지 않았습니까.
▲그 덕에 학예연구사 5명이라도 얻게 되었지요.
90년에 금호그룹에서 규장각에 5억원을 기탁해 그 이자를 자금으로 특별연구원 3명을 두고 근대 법령집도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서둘러 출판해야 될 자료로는 어떤게 있을까요.
▲2백90여종,1천벌의 고지도를 영각하는게 시급합니다.
지도는 그림의 일종이니까 판화본 몇개를 제외하면 전부 유일본입니다.
고지도 전문가가 국내에 2∼3명밖에 없는 것은 자료를 대하기 어려운 탓입니다.
우리 고지도는 양식이 다양하고 특히 진경산수도의 화풍으로 그린 것은 중국이나 일본에 없는 특이한 양식입니다.
­규장각의 유래를 설명해 주십시오.
▲규자각은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왕명으로 설치한 기록보관소·도서관·학술기관·정치기구였습니다.
정조말기에 8만권이던 장서가 대한제국 때에는 사대사고 등에 소장된 도서까지 관장하게 돼 더욱 늘어났지요.
일제때 조선총독부에서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자료를 이관,서울대학으로 이어져 온 것이지요.
­민족사료의 집결지로서 규장각이 앞으로 더 본격적인 사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교육부산하 역사전담기구격인 국사편찬위원회의 사업을 상당부분 이곳에서 맡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임시정부·독립운동에서 현재에 이르는 정부 역사쪽을 정리하는 일을 맡고 1910년 이전의 역사는 대부분의 자료를 가지고 있는 규장각에서 맡는게 바람직합니다.
89년에 규장각과 국사편찬위원회를 합친 기능을 갖고 있는 일본 동경대 사료편찬소를 방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직원 80여명,연간 50여억원의 사업비에 당시까지 8백책을 펴낸 활동상이 부러웠습니다.<조현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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