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바꾼 리더십 ⑦ 서울 명지고 박성수 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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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동안 전 과목 보조 교과서를 개발해 온 명지고 박성수 교장(앞줄)과 교재개발실 교사들이 수집한 자료를 수북이 쌓아 놓고 한자리에 모였다. 뒷줄 왼쪽부터 조기형.안미영.배병배.신경헌 교사.박종근 기자

"The keyword of this chapter is 'plate tectonics'. In 1915 Alefredo Wegener, German meteorologist …."

("수업 주제는'판 구조론'입니다. 1915년 알프레트 베게너라는 독일 기상학자가…. ")

25일 서울 홍은동 명지고 1학년 지리 수업시간. 민한샘 교사의 영어 강의에 학생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받아 적는다. 박병규군은 "우리말 수업보다 진도가 더디지만 사회.과학 용어를 영어로 익히고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없앨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이 학교는 1학년 4개 학급, 2학년 2개 학급의 영어.과학.사회.수학 수업은 영어로 진행된다. 학생이 원하면 누구나 영어반에 배치된다.

영어 수업뿐만이 아니다. 이 학교는 '독학'이 가능한 과목별 보조 교과서를 자체적으로 만들어 사용한다. 수업 방식을 바꿔 학생들의 공부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다. 이 같은 명지고의 교육실험을 이끄는 사람은 전주대 총장을 거쳐 2002년 부임한 박성수(65) 교장이다.

◆ 교과서.수업방식의 새 틀 마련=박 교장이 처음 손댄 것은 교과서였다. 기존 교과서는 너무 함축적이어서 학생 혼자 공부하기 어렵고, 교사가 다 설명하자니 시간이 모자라 학생들이 학원을 기웃거리게 된다는 판단에서다. 일선 학교가 교과서를 보완할 자체 교재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부 교사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박 교장은 서두르지 않는 '소걸음 리더십'으로 교사들을 이끌었다. 처음 1년 동안은 자료만 모으자고 했다. 학생들의 학습동기를 자극할 수 있는 읽기 자료와 그림을 과목별로 수천 쪽씩 모았다. 선진국의 교과서도 사모았다. 2년째는 쌓인 자료를 간추리고 분석했다. 2005년부터 교사들이 직접 엮어낸 보조교재를 수업에 활용할 수 있었다. '두껍지만 친절한' 명지고만의 교과서가 탄생한 것이다.

두꺼워진 교과서는 강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학생들의 예습은 필수였고, 토론식 수업이 가능해졌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이해도에 따라 기본 개념을 정리해 주고 질문에 답해 주면 됐다.

처음엔 학부모 항의가 빗발쳤다. "예습 과제를 많이 내주면 도대체 언제 학원을 다니느냐"는 것이었다. 박 교장은 단호했다. "학원에 보내지 말라고 하는 일입니다." 조금씩 성과가 나타났다. 학교가 2월에 설문조사한 결과 고2 학생들의 60% 이상이"학원 수강이나 과외를 줄이겠다"고 답했다. 3학년 정형주군은 "학교에서 만든 교재만으로도 공부하는 데 충분하다"고 말했다.

◆ 사랑으로 보듬자=박 교장은 무체벌.무촌지.무탈락의 '3무(無)'를 교사들에게 주문했다. 제자를 때리지 말고, 학부모에게 돈 받지 말고, 한 명의 학생도 중도에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학생을 때리는 교사가 눈에 띄면 회의 때 "누가 아직도 학생을 때린다. 때려서 가르치는 게 선생이면 아무나 선생 하겠네"라며 주의를 환기했다. 3년이 지나자 체벌은 사라졌다.

'무탈락'을 위한 비책은 3년에 걸친 '인생 상담 프로젝트'다. 이 학교에 배정받은 학생들은 입학 전에 숙제가 있다. 관심있는 직업과 학과 200개씩을 적어내는 것이다. 그 뒤 분기별로 정규수업 한 시간씩을 할애해 '어떤 학과에 진학해 어떤 직업을 가질지' 고민하게 한다. 3학년이 되면 희망사항은 5개로 줄어든다. 학생부 민형준 교사는 "생활지도 방식을 바꾸자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과 학교에서 '마음이 떠난' 아이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말했다.

임장혁 기자<jhim@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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