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인종갈등 심화가능성/LA폭동으로 본 편견·불평등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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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백인들,기회균등 요구에 피해의식/28년전 제정된 공민권법 의미 퇴색
로스앤젤레스 폭동은 인종융화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또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미국에서 흑백차별을 금지한 소위 공민권법이 만들어진 것은 불과 28년전이다. 그만큼 미국의 인종적 편견과 불평등은 뿌리 깊다고 할 수 있다.
무죄평결이 난 백인 경찰관에 대한 재조사의 법적 근거가 되고 있는 공민권법은 지난 64년 마틴 루터 킹목사를 지도자로 하는 흑인운동민권운동에 의해 비로소 만들어 질 수 있었다.
이 법은 미국이 제2차 대전에서 자유·평등을 내세워 승리하면서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인우세의 사회에서 법제정이 쉽지 않았다.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대통령은 독일과 일본의 국가주의에 대해 자유와 모든 국민의 평등을 내세우며 전쟁에 개입,승리했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내세운 자유와 평등은 사실상 낯 간지러운 거짓말이었다. 미국은 당시 흑인에게 완전한 민권을 주지 않으면서도 시민권의 지고한 의무인 징병제로 흑인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또 동맹국 중국으로부터의 이민규제도 철폐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후 흑인들이 공민권운동을 시작했을때 백인들은 이를 억누를 구실이나 논리가 없었다.
한편 킹목사가 주도한 민권운동은 기본적으로 백인사회와의 동화를 목표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는 『우리들도 백인들처럼 아메리칸 드림에 참가시키라』고 외쳤다.
그는 적자생존의 사회 진화론을 전제로 한 미국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삼갔다.
킹목사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60년대말 미국에서 암살되기 직전까지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을 삼갔던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는 타민족과 마찬가지로 흑인도 2세,3세로 세대가 바뀌는 것에 의해 미 사회에서 상류계급으로 올라갈 것을 원했다.
그러나 당시 킹목사의 동화론에는 강한 비판 세력이 있었다.
백인과 흑인은 동화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분리론으로 고 에라이저 모하마드를 지도자로 하는 시카고의 블랙무슬림이 그 대표였다. 블랙무슬림운동은 현재 루이스 화라칸을 지도자로 흑인의 경제적 자립을 내건 기업운동으로 변했다.
킹목사의 공민권운동에 대한 최대의 비판자는 킹목사처럼 암살된 말콤 엑스였다. 말콤 엑스는 블랙무슬림 당원이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사상적 시야를 넓혀 『제3세계의 해방이 이뤄지지 않으면 미 흑인의 진정한 해방도 될 수 없다』며 민권운동을 하다 암살됐다.
이같은 흑인 민권운동가의 운동으로 공민권법이 만들어진지 28년이 됐다.
그러나 백인사회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의식과 이를 반영한 공화당 보수파의 오랜 집권으로 공민권운동은 활력을 잃고 약화됐다. 공민권운동의 기회균등 요구는 인종할당으로 흑인을 우대하지 말라는 보수적 백인의 주장으로 그 의미가 변하고 있다.
백인 중산층은 리버럴,즉 진보적이라는 말도 흑인의 범죄,과중한 복지,사생아,학교교육의 퇴폐 등과 동의어로 보고 있다.
그들은 기회균등이 모두 자신들의 희생으로 메워진다는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 있다.
가진 계층이 미국의 경제적 몰락과 함께 약자에 대해 베풀 수 있는 여유를 잃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발생한 흑인의 폭동은 백인사회의 차별의식을 더욱 가속화시킬 가능성도 안고 있다.<미주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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