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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2150억원짜리 합의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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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번 회담에선 쌀 지원과 북핵 해결을 위한 2.13 합의의 연결 고리가 느슨해졌다. 정부는 회담 직전 "2.13 합의의 조속한 이행을 북한에 촉구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북측은 강력 반발했고, 최종 합의문에 2.13 관련 문구는 들어가지 못했다.

진동수(재경부 차관) 남측 위원장은 회담 종료 후 "2.13 합의 이행이 (쌀 지원의) 키(key)"라고 거듭 강조했다. 회담 관계자들은 "북측에 몇 차례나 확실히 얘기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5월 하순 첫 항차(航次)를 출항시킨다"는 쌀 차관 제공 합의서를 써준 마당에 북한은 이를 근거로 쌀 지원을 재촉할 가능성이 크다.

◆퍼 주고도 보장받지 못한 열차 시험 운행=북측에 주기로 한 쌀 40만t과 경공업 원자재는 돈으로 따져 2억3200만 달러(약 2150억원)에 해당한다. 개성공단 내 북한 노동자의 숙소.편의시설 건설 등 다른 합의 이행에도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북측이 반대급부로 내놓아야 할 열차 시험 운행 합의는 미덥지 않다.

5월 17일로 날짜를 잡았지만 이에 필요한 북한 군부의 보장조치는 "쌍방이 적극 협력한다"는 원칙론에 그쳤다. 북측은 지난해 5월 25일 하기로 합의했던 열차 시험 운행을 "군부가 반대한다"며 일방적으로 깼던 전례가 있다. 평양방송은 '군사 보장'에 대해 일언반구 없이 합의문을 보도했다. 북측의 '합의 파기'가능성은 여전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끌려다닌 회담=19일 첫 전체회의에 앞서 북한은 쌀 차관 제공 합의서 초안 등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쌀을 주지 않으면 회담에 응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7시간이나 지연된 전체회의에서도 북측은 "쌀과 2.13 합의를 연계하지 마라"며 25분 만에 퇴장했다. 북측은 거친 태도로 나왔으나 남측 대표단은 회담 일정을 하루 더 연장하며 협상에 매달렸다.

그뿐 아니다. 북한은 쌀 지원을 챙기기 위해 육로를 열면서도 남측의 경협 물자 육로 수송 제안을 거절했다. 남측이 제안한 ▶남북 간 직선 항공로 개설 ▶개성공단 노동자 임금 직접 지불 문제도 수용치 않았다. 반면 북한이 요구한 쌀과 경공업 원자재 지원은 각각 부속합의서까지 써줬다. 그럼에도 이재정 통일부 장관은 "학점으로 따지면 수(秀)를 주겠다"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남북 관계 개선이나 경협 확대보다 쌀.원자재 등 물자 조달에 전력투구하고 있다"며 "그런 현실에서 우리의 전략적 대응이 충분치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또 지난해 6월 12차 회의 멤버에다 두 명을 보강한 북한과 달리 남측은 협상단 중 위원장을 포함한 6명 모두를 교체해 회담의 주도권을 놓쳤다는 자성론이 나온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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