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불황속 성업” 벼룩시장(지구촌화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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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생필품 교환에 골동품도 매매/“돈되면 뭐라도” 국보급 즐비… 중개 광고지 불티
모스크바등 러시아의 대도시 곳곳에서 벼룩시장과 사설광고업이 한창 활기를 띠고 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마저 생활고를 불평할 정도로 경제전반이 불황의 늪을 허우적거리는 러시아에서는 의외의 호황이다.
그러나 벼룩시장과 사설광고업의 호황도 따지고 보면 극심한 경제난 때문이다.
돈은 있어도 살 물건이 마땅찮고 사고픈 물건은 있어도 돈이 없어 쩔쩔매는 것이 러시아 경제의 현주소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이 팔거나 다른 물건과 맞바꾸기 위해 이것저것 내놓아 벼룩시장이 제철을 맞고 있다. 또 주로 벼룩시장 거래를 중개하는 사설광고업도 덩달아 붐을 타게 됐다.
벼룩시장에 나오는 물건은 자잘한 옷가지에서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골동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벼룩시장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모스크바 변두리 이즈마일로보의 노천시장이다.
이곳에는 러시아는 물론 중앙아시아 각국과 카프카스 남쪽지역등 구소련 방방곡곡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온 성상(이콘)·양탄자 수공예품·골동품 등 국보급 문화유산들이 즐비해 1루블의 입장료를 내야만 들어갈 수 있는데도 인파가 끊이지 않는다.
특히 「사라진 제국」소련을 상기할만한 기념물을 간직하려는 외국인들의 발길이 잦다.
벼룩시장 물건값은 희귀한 골동품이라도 1개에 3백달러(23만원)를 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화유산치고는 턱없이 싼값이지만 고르바초프의 한달 연금이 4천루블,즉 40달러(3만원) 정도뿐인 점을 감안할 때 러시아인에게는 거금이다.
이에 따라 아예 전국 곳곳을 누벼 골동품을 모아 벼룩시장에 내다파는 전문상인도 생겨나고 있다. 성상등을 구하기 위해 한달에 두세차례씩 시골마을을 여행하는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씨는 자신의 월수입이 2만∼3만루블이라면서도 『다른 거래상들은 훨씬 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말한다.
한편 사설광고는 애당초 희망거래 내용을 직접 손으로 쓴 벼룩시장 주변 벽보 등으로부터 시작됐으나 이제는 전문광고잡지까지 생겨났을만큼 인기업종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러시아·이탈리아 합작으로 최근 창간된 『손에서 손으로(이즈 루크브 루키)』라는 광고전문 주간지는 5만부를 찍어 1부에 2루블씩 판매되고 있으나 없어서 못팔 지경이다.
『이란산 큰 사이즈 남자바지를 자본주의나라산 중간사이즈 남자바지와 맞바꾸자』『여자부츠 한켤레와 냉장고를 부엌찬장 2개와 바꾸고 싶다』는 등의 내용이 주가 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미제 하이힐 한켤레를 굽이 약간 낮은 구두와 바꾸자』면서 『바꿀 구두는 반드시 미제가 아니라도 좋으나 사회주의나라였던 곳에서 만든 구두만은 사양한다』는 단서를 덧붙이기도 했다.
『레닌전집』『스탈린전집』 등 사회주의적 성전들도 자주 처분대상에 올라 사회주의 미몽에서 깨어난 러시아인들의 의식변화를 대변하기도 한다. 심지어 『이 나라를 영원히 떠나 함께 살 예술가나 사업가를 구한다』는 이색 구혼광고까지 실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몰락직전의 소련정부로부터 경제대권을 인수한 러시아정부는 그동안 가격자유화·국영상점 매각·농지불하 등 경제회생을 위해 안간힘을 써왔으나 아직까지 이렇다할 효험을 보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경제가 이처럼 불황에 허덕이는한 벼룩시장과 사설광고업의 호황은 계속될 것이다.<정태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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