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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와 노무현의 '파격 행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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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5년 전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던 부시에게 2.13 합의는 전략적 패배였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 자금 문제는 미국 국내외 금융질서의 안전을 위협하는 도저히 묵인할 수 없는 불법행위였다. 북한을 달래느라 이 자금을 전액 해제하고,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에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1월 북한에서 에티오피아로 무기가 수출되는 것을 묵인했다는 오해까지 받고 있다. 엄청난 파격이요 자기모순이다.

이라크 사태와 이란 핵개발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쉬운' 북핵 문제에서 성과를 올리려는 몸부림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북한이 어떤 상대인가. 영변 핵시설이 폐쇄된다 해도 핵물질의 추가 생산을 막을 뿐 이미 생산한 핵물질의 폐기에는 분명한 언급이 없다. 부시는 내심 핵의 불능화까지는 못 가더라도 북한과 협상 국면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이익이 된다는 계산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북한의 2차 핵실험 같은 대북정책 대실패의 악몽을 예방하고, 외교적 해결을 다그치는 미국 내 민주당 세력 등의 입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역시 국제제재를 피하면서 경제 지원을 확보하고, 한국의 연말 대선에서 남한 내 대북 강경세력의 득세를 막기 위해 협상 국면을 유지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이는 서로 간에 시간을 벌어줄 수는 있어도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못 된다. 한반도에 핵은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부시의 '결단'은 업적은커녕 역사적 대과오로 기록될 것이다.

자주와 균형으로 한.미 간에 긴장을 조성해 오던 노 대통령이 '정치적 손해를 무릅쓰고' 한.미 FTA 타결을 주도한 것은 실로 아이러니다. 국내적으로 경제 자율성을 위축시키고 규제를 강화하고 국가 균형발전 같은 평면적 균형에 집착하면서 유독 대외 개방에 적극적인 배경도 여전히 수수께끼다. 한.미 FTA 타결 내용은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우선 양쪽의 민감한 부문들이 제외됐다. 한.미 FTA가 세계 무역자유화에 기여하려면 소아(小我)를 버리고 서로가 아끼는 것들을 대승적으로 개방해야 한다. 피해 최소화에만 매달리는 FTA는 그들만의 닫힌, 또 하나의 무역 블록일 뿐이다.

부시가 FTA에 응한 배경에도 온도차가 느껴진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이후 FTA 확대에 이렇다 할 진전이 없고 세계 무역자유화를 위한 도하 라운드도 지지부진한 상태다. 게다가 미국 내에서 보호무역 세력이 득세해 무역 자유화를 선도해야 하는 미국 입장이 난처하던 차에 한국의 제의를 받은 것이다. '업적'에 집착해 타결 자체에 무게를 둔 인상이 짙다.

우리 입장에서 한.미 FTA는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다. 그러나 산을 넘기까지의 고난을 어떻게 이겨내느냐는 문제보다 산 너머 장밋빛 세계와 그 홍보에 온통 들떠 있다. 한.미관계가 가장 껄끄러운 시기에, '반미면 어때' 하는 대통령 주도로 체결됐다는 것 자체가 한.미 FTA의 험난한 앞날을 예고한다.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 문제는 조급하게 정치적으로 접근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를 둘러싼 한.미 간 인식차는 동상이몽을 떠올린다.

두 대통령의 '대타결'에 공통된 문제는 계산만 있고 믿음과 선의(goodwill)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다국 간, 국가 간 합의나 협정의 생명은 당사자 간 신뢰와 선의다. 국면 돌파를 위한 전략적 접근에서는 기본적인 진정성마저 담보하기 어렵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에 대비한 우리의 전략은 무엇인가. 한.미 FTA에 걸맞은 대내적 개방과 자율화의 로드맵은 서 있는가. FTA는 정치나 이념의 문제가 아닌, 먹고사는 문제며 민족적 감정이나 정략적 의도로 접근해선 안 된다고 대통령 스스로 강조했다. 한.미 FTA를 진정으로 성공시키고 중국.일본과의 FTA 외연을 넓혀 동북아 허브로 탈바꿈하려면 우리 내부의 이념적, 반(反)시장적, 평균주의적 요소부터 몰아내야 한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노 대통령에게서 또 한번의 '파격'을 기대할 수는 없을까.

변상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