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심판의 뜻 겸허히 되새기자(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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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유권자는 무섭고 단호했다. 실적없고 믿음을 주지못한 집권당의 안정논리엔 등을 돌렸다. 밀실거래로 짜맞춰 화학적 통합을 이루지 못한 거여의 힘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유권자는 사려깊고 진취적 이었다. 제1야당의 견제논리를 경청하면서 기성정치의 구각을 깨겠다는 새 야당의 존재를 밀어올렸다.
민자당의 과반의석 확보 실패,민주당의 약진,신생국민당의 급부상,무소속 득세로 판정난 14대 총선은 기성정계엔 충격과 혼란을,다수 국민에겐 변화에 대한 기대를 안겨주었다.
이같은 결과가 정계개편과 정치권의 지각변동으로 발전할지,아니면 하나의 이변정도로 수습될지는 아직 속단키 어렵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가 불과 11개월 밖에 남지 않았고 대통령 선거를 불과 9개월 정도 앞둔 시점을 고려할때 「대난」의 여파는 심상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4년 실정 엄한 추궁
민자당의 대패는 뭐니뭐니해도 노태우 정부의 4년 실정에 대한 엄한 추궁으로 봐야한다. 이행전략이 뒷받침 되지 않는 민주화는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와 비효율을 남겼다. 물가가 폭등하고 경제와 민생이 현저히 나빠진 것을 대다수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터에 여당만이 안정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은 먹혀들기 어려웠다.
또 노정부는 국정관리 능력에서 믿음과 기대를 주지 못했다. 국민당의 정주영 대표가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대통령의 자질과 정직에 대한 회의론은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국민 뇌리에 깊이 파고든게 사실이다. 민주화란 이유만으로 경제의 정체가 정당화 될 수 없었고 오히려 국민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 민주니,독재니 하는 정치성 쟁점보다 경제문제가 더 큰 관심을 끌고,민자당 정권의 무능과 부패가 공격의 대상이 됐던 점은 시사하는바 크다. 신뢰·실천이 뒷받침 되지 않은 안정논리는 보수성향의 유권자들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6공정부의 국가관리 능력부족과 정책실패는 3당 합당후의 민자당 정치행태와 맞물려 더욱 인기하락의 요인이 된 것으로 분석된다. 구국의 결단이란 3당합당의 명분은 2년여 계속된 대권 싸움으로 야합의 이미지만 굳혔다. 논리도,체면도,신의도 발견할 수 없는 계파간 세력 나눠먹기가 정치지도자들의 도덕성에 혐오와 불신을 가중시켰으리란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그 결과 노대통령은 기반지역인 대구·경북에서 무소속·국민당의 예상외 득세를 자초했고,김영삼 대표는 부산 싹쓸이를 빼고는 전국 도처에서 자파 퇴조의 쓴맛을 봤다. 공천에서 유달리 계파지분에 집착했던 김종필 최고위원은 텃밭 충청권에서 큰 좌절을 겪었다.
○불신받은 안정논리
1노 2김의 지역성 안주,계파 나눠먹기식이 서울·수도권 참패의 첫째 요인임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밀실·붕당정치가 여지없이 철퇴를 맞은 셈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노력 없이는 민자당이 정상적인 탈출구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민주당이 기대 이상 선전한 것은 호남의 튼튼한 지역기반 외에 통합야당의 견제호소가 설득력을 가졌기 때문인 것 같다. 김대중 대표의 호남 뿌리는 노대통령·김영삼 대표의 영남 뿌리보다 더 강함이 재입증 되었다.
민주당이 서울에서 압승한 것은 독자적 노력 못지않게 정치환경의 덕을 본 것으로 풀이된다. 우선 견제세력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중립적 유권자들이 대거 투표에 참여해 민주당에 표를 준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안기부원의 흑색선전,군 부재자투표 시비 등 여당의 막판악재가 반사이득으로 작용했다.
국민당의 급부상은 기성정치에 대한 국민의 염증과 불신이 하나의 대안으로서 신생정당에 쏠렸기 때문이다.
국민당에 대한 지지표가 전국에서 비교적 골고루 나왔다는 점에서 이런점이 확인된다. 순발력 있는 선거전략,정당조직보다 유능한 대기업 조직의 기반,여유있는 자금력 등이 신생 국민당 돌풍의 바탕이 된 것 또한 물론이다.
민자·민주당의 공천탈락자들을 내세워 여유있게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었던 국민당의 세는 앞으로 대통령 선거에서도 비슷한 변수가 되지 않을까 주목된다.
전체적으로 볼때 이번 선거에서 금권과 관권의 영향력은 과거보다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봐야한다. 오히려 섣불리 쓰다간 악재가 될 위험만 컸다. 이점 우리 선거문화의 한 진전으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감정과 인재의 편중현상은 우리 선거문화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북에서 민자당이 2석을 건진 것에 어느정도 의미를 부여할만 하나 민주당의 광주·전남 싹쓸이와 영남지역에 민주당이 전혀 파고들 수 없었던 것을 보면 지역감정의 두터운 벽을 실감할 수 있다.
○안정회복에 노력해야
이번 선거는 기존 정당의 대권경쟁,정당의 공천운영 방식 등에 앞으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할 것으로 보인다. 당장 민자당의 대통령후보 선출구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연속 두번째 여소야대의 정치구도는 지방자치단체장선거 실시 연기여부 논란·연말의 대통령 선거와 겹쳐 우리 정치의 불확실성을 장기화시킬 위험이 크다. 민자당은 무수속의 영입으로 안정의석을 확보하려 할 것이나 정치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그마저 어렵게 할 공산이 크다.
이러한 정치의 불확실성은 경제·사회 전반에 불안의 그림자로 연결될 위험이 있다.
때문에 정부와 여야 정당들은 국민이 내린 심판의 의미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국민 요구에 부응하는 변신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정부여당은 선거의 패인을 냉정히 분석,국민의 혐오대상이 돼온 당 내분을 조속히 추스리고 정치·사회의 안정과 경제회복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민주·국민당 등 야당도 그들의 성취에 자만하지 말고 정치의 조속한 안정을 위해 보다 성숙하고 책임있는 비판자의 입장을 지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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