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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시론

2·13 합의에 거는 자기최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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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월 13일 이후 사람들은 60일이 지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겠지 하며 두 달을 보냈다. 지난 토요일 그 시한은 끝났고 북한 핵문제에 관해 일어난 변화는 아무것도 없다. 많은 접촉이 있었고 많은 말이 오갔을 뿐이다. '60일 이내'에 북한은 영변 핵시설을 폐쇄.봉인하고, 이 과정을 확인시키기 위해 국제원자력기구(IAEA) 요원들의 입국을 허용하며, 핵 프로그램 신고 목록을 6자회담 참가국들과 협의하기로 했었다.

60일 약속이 깨진 지금 이상한 두 가지 현상이 목격되고 있다. 2.13 합의문 어디에도 없고 북한 핵 문제와 관련도 없는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계좌 문제가 온통 관심을 끌고 있다. 물론 2.13 합의에 대한 북한의 실천을 전제조건으로 미국이 BDA 문제 해결을 비공개적으로 약속했고, 따라서 BDA 문제 해결 지연은 북한의 보이콧이 이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돈 문제가 '반드시' 먼저 풀려야 한다는 것은 북한이 만들어낸 주장이다. 또 하나는 시한을 넘긴 2.13 합의의 앞날이 불투명함에도 북한을 질책하거나 사태를 비관하는 나라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어렵사리 가꿔 놓은 대화의 분위기가 깨질세라 모두 전전긍긍하고 있다.

예기치 못했던 BDA 걸림돌이 늦게나마 제거되고 북한이 약속한 행동을 개시하면 60일 논란은 이내 종식될 수 있다. 이번 BDA 해프닝을 통해 우리는 북한이라는 나라의 실체를 좀 더 분명히 아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마카오에 묶인 약 200억원의 돈은 우리나라의 웬만한 부자 한 사람의 재산에도 못 미치는 액수다. 북한은 이 돈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찾아가려 한다. 최고지도자의 비자금 회수가 곧 국가의 제1 외교 목표가 될 만큼 권력이 사유화된 나라라는 뜻이다.

미국이 3월 14일 BDA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하면서 북한이 자금을 인출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하지만 '불법 자금'이란 꼬리표가 붙어 있어 은행에서의 인출 절차가 작동하지 못한 채 한 달이 흘렀다. 불법 자금은 중국 은행도, BDA도 다뤄선 안 된다는 미국의 종래 원칙이 오히려 문제의 해결을 방해한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될 사실은 가장 초보적인 은행 거래 관행에서도 북한은 국제사회의 기준을 체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북한이 BDA에 개설한 52개의 계좌는 모두 관변 무역회사.은행 등이 망라된 차명계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탈법과 편법이 관행인 국가를 상대로 합리성에 따른 협상과 이행절차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북한이 이번 주부터라도 2.13 합의를 하나씩 실천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국가의 합리성 때문이 아니라 북한 정권이 생각하는 정권의 생존과 관련한 합리성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합리성은 북한이 약속한 행동을 하나씩 이행할 때마다 보상을 하나씩 늘려가는 것이다. 북한 당국이 지금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합리성은 2.13 합의에서 약속한 범위 내에서 행동하되 반대급부를 최대한 얻어내는 것이다. 2.13 합의는 북한이 이미 보유한 핵탄두와 무기급 플루토늄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물질적 지원도 받아내고 핵 지위도 유지하는 것이 북한의 '꿩 먹고 알 먹고' 식 계산이라면 6자회담은 지금 목표 자체를 망각한 자기최면에 빠져 있는 꼴이다.

북한이 끝끝내 핵을 움켜쥐고 절대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2.13 합의 직후부터 북한의 선의 하나만 믿고 각종 대북 지원책을 쏟아내고 있는 우리 정부의 태도는 2.13 합의의 이행을 가로막고 북한 핵 문제의 온전한 해결을 방해하는 자충수가 될 것이다. 한국이 제공하는 물질적 편의가 클수록 북한식 합리성은 더욱 강화될 것이며, 행동별 요구 내용은 더욱 거창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냉철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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