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뭘 알고나 하는 공약인지…/이종대(시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활력상실의 기미가 뚜렷해진 우리경제에 「위기」 또는 「난국」의 꼬리표가 붙으면서 정치적 민주화과정에서 빚어진 과도기적 현상들이 경제난의 유력한 원인으로 곧잘 지저되곤 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여러 이해집단의 거센 욕구분출,극심해진 노사분규,경제정책의 실기와 일관성 결여 등이 그같은 과도기적 현상의 대표적 사례들로 파악돼 왔다.
이런 논리의 저변에는 권위주의를 민주적 체제로 바꿔나가려면 일정한 경제적 희생을 정치발전의 비용으로 감수할 수 밖에 없다는 시각이 깔려 있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 있어서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을 비용과 산출의 관계로 파악하는 발상법은 오늘날 꽤 널리 인용되는 개발독재론의 함축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헛 쓴 정치발전 비용
이 논의의 한계에 대한 시비는 일단 접어두고,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의 상호관계에 초점을 맞춰 이번 총선의 양상을 들여다보면 정치발전이란 엄청나게 비싼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4년간 지불한 비용의 크기에 비해 정치발전의 내실은 너무 빈약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총선거는 한 국가의 정치적 성숙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로 가득차 있다. 정당·후보·유권자,정부·선거관리위원회·검찰·경찰,그리고 언론·재계·각종 사회단체·대학사회가 모두 선거와 관련된 그 나름의 행동양식을 나타내고,특히 이번에는 거대기업과 특정정당 사이의 관계까지 새로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총체적으로 말해,이번 총선과정에서 목격되는 현상들의 기본성격은 4년전의 총선거에서 본 것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고,따라서 정치발전을 위해 경제적 대가를 지불한 것이 사실이라면 참 소중한 것을 많이도 헛되이 내버렸다는 허탈감을 지을 수가 없다.
집권을 노리는 정당과 국회의원당선을 목표로 하는 후보들이 앞으로 실천하겠다고 내건 공약의 내용들은 구태의 표본으로 꼽힌다. 대부분의 공약들이 허구와 비합리로 일관하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당면 경제현안인 물가안정·수출증대·국제수지개선·기술개발·중소기업 육성·농촌사회의 발전을 외치고 있지만 국가적·차원의 이들 쟁점들에 있어서는 대개 제목을 나열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만다.
그것을 실천할 구체적 수단이나 치밀한 계획이 없다. 「머슴」이나 「심부름꾼」으로 자처하는 후보들이 정말 주인을 어려워했더라면 주인앞에 내놓는 공약의 준비에 그처럼 무성의했을 리가 없다.
그나마 약간의 구체성을 띠는 공약들은 주로 지역개발사업에 관한 것들이다. 도로건설과 포장·하천복개·회관건립·도청유치·직할시 승격·공단건설 등 수십년간의 단골메뉴들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전국 선거구에서 무작정 약속만 내놓은 이 사업들을 실제로 추진하자면 우리나라 전체예산을 몇년동안 고스란히 쏟아부어도 모자랄 것이다.
○다 지키려면 경제 엉망
뿐만 아니라 개발사업들이 국토개발의 전체구도에서 과연 합리적인 것이며 현실적으로 재원조달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런 지역개발사업들은 실제로 불가능하거나 차라리 공약으로 끝나는 것이 국민경제전체를 위해 바람직한 일일지도 모른다.
만약 당선된 의원들이 선거운동에서 내세운 지역개발공약을 저마다 정직하게 실현시키려 든다면 중앙 및 지방정부는 이들 의원들의 예산쟁탈전으로 수라장이 될 것이고 그 많은 개발사업들을 한꺼번에 추진하게 되면 선거공약의 다른 항목들에 들어있는 물가와 국제수지는 엉망이 될 것이다.
많은 후보들이 이처럼 설익은 공약의 남발을 일삼는 것은 국가를 위한 자신의 헌신보다 국회의원자리에 대한 욕심이 앞선 탓이라고 해석해야 옳다.
이에 대해서는 정견과 능력을 가볍게 다룬 정당의 공천심사에도 그 책임이 있다. 각 정당들이 국회의원 지망생들에게 국가적 차원에서 무슨일을 어떤 방법으로 추진하겠는가를 묻고 그 내용에 대한 평가점수를 중시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저수준의 경쟁양상은 모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야의 지도자들을 포함한 각 지역후보들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이용하는 작태도 예나 다를 것이 없다. 굳이 영호남이 아닌 지역에서도 지역내 주민의 출신지별 구성에 신경을 쓰지않는 후보를 찾아보기 힘들고,유세장에는 지역감정을 촉발시키는 발언들이 끊이지 않는다.
고조된 지역감정이 얼마나 큰 파괴력으로 우리사회의 응집력과 안정을 훼손할 것인가는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일이지만 그것의 경제적 해악도 작은 것이 아니다. 막대한 투자를 수반하는 각종 국토개발사업들의 우선순위와 입지선정이 지역안배의 단순논리에 지배당할때 그로 인한 자원의 낭비와 사업의 효율성 저해는 결국 국민의 부담증가,또는 국민복지의 손실로 귀착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정치가 국민의 짐덩이
한마디로 총선과정에서 대거 표출된 정치행태의 전근대성으로 인해 적어도 14대국회의 임기안에는 정치가 경제에 대한 무거운 짐덩어리로 계속 남아있을 소지가 크다.
정당과 후보자들이 정치의 저개발상태를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결국 국민들이 이를 타파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는 수 밖에 없다.
유세장에서 지역개발사업을 늘어놓는 후보자에게 유권자들이 재원조달방법을 큰소리로 물어야 한다. 교묘한 표현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발언앞에서는 즉석에서 등을 돌려야 한다. 주권자의 이러한 행동들은 앞으로 4년간 주권자 자신의 살림에 닥쳐올 주름살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자구책인 것이다.<기아경제연구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