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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일의 여행스케치] 자연의 속살 같은 이름들을 만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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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혼자서든 여럿이서든 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일상생활이 인생의 산문이라면 여행은 인생의 시와 같다. 실로 여행은 낯선 세상을 낯익은 얼굴로 살아가게 하고, 낯선 얼굴들도 낯익은 눈으로 만나게 해준다. 그러나, 그것도 여행의 지혜를 터득한 자들만이 누리는 즐거움이요, 감동이다.

그동안 우리의 여행은 가서 구경하고 먹고 마시고 놀다 오는 것이 전부였다. 목적지를 가고 오는 이동시간도 여행의 소중한 일부일진대, 대개는 그 시간을 지루하고 불필요한 시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 나머지 잠을 자거나 시속(時俗) 이야기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해버린다. 차창을 지나가는 자연과 풍물에는 도무지 관심들이 없다. 그러다 보니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자신이 어느 산을 돌아, 어느 강을 건너, 어느 마을을 지나왔는지의 중도(中途) 과정이 생략돼 있다.

여행의 주제는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비록 출장길이라도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그 길을 자신만의 주제가 있는 여행길로 만들 수 있다. 주제가 정해지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달라진다. 차창 밖을 번개처럼 스쳐가는 것도 저마다 의미를 갖게 된다.

굳이 거창한 주제를 내걸 필요는 없다. 차창 밖을 스쳐가는 산과 강, 그리고 산자락의 숲.마을들의 모습과 정겨운 지명까지도 감동 있는 여행을 만들어 주는 작은 소재들이다.

'물알-버들미-갈골-쏘두들-가사리-황새말-꿩마-올미-보리골-갈래-뒷실-고리재…'. 이것은 강원도의 어느 지방을 여행하면서 차창 밖을 스쳐간 마을 이름들을 적어본 것이다. 물밑에 자갈 구르는 소리처럼 해맑은 마을 이름들이다. 가만히 소리내어 읊어보면 마치 한편의 시를 읽는 느낌이 든다.

'신림 1, 2, 3, 4동…, 주공 1, 2, 3, 4단지…, 현대아파트 A, B, C동….' 등등 도시민들의 귀에 익숙해진 마을 이름과는 너무나 느낌이 다르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주워 보면 나무를 쳐다보지 않아도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있다. 그렇듯이 그 사람이 일상에서 쓰고 버린 낱말들을 주워 보면 그 사람의 삶의 질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인터넷.게임.카드.운전.지하철.엘리베이터.결재.벤처.세일.코스닥.커피…. 이것이 도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쓰고 버리는 언어들이다.

삶이 기계화될수록 일상언어도 단순해지게 마련이다. 도시민들의 단순 언어들은 도시의 물신적이고 반생명적인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행은 그러한 기계적 언어의 세계에서 잠시나마 일탈해 보는 데 의의가 있다.

'자연'은 여행의 영원한 주제다. 신라를 보러 가든 백제를 보러 가든, 골프를 치러 가든 등산을 가든, 신혼여행을 가든 출장을 가든 가는 곳마다 자연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자연의 낱말들은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또 다른 세상으로 우리들을 안내한다. 자연의 낱말들은 괴리된 자연과의 거리를 좁혀주고 팍팍해진 도시의 삶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김재일 두레생태기행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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