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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도시는 리모델링 중] 5. 英 도크랜즈·獨 포츠담광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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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세계 도시들의 재개발 사업 중에는 해당 구역의 발전뿐 아니라 주변 지역으로의 파급 효과까지 노리는 것도 많다. 이른바 '거점 건설'방식이다. 대표적 사례로 런던의 도크랜즈(Docklands) 재개발을 들 수 있다. 메트로폴리스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을 거점으로 템스강 연안 도크랜즈를 선정해 1981년 시작했다.

도크랜즈는 17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붐볐던 부두 지역이다. 인근에선 숱한 영세 제조업체들이 주민들에게 저임금의 일자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새로운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주항만이 동쪽의 틸버리로 옮겨가자 제조업까지 빠져나가 지역 전체가 피폐해졌다.

런던 항만청은 이 지역의 잠재력이 부동산에 있다고 판단해 70년대 초부터 재개발을 추진했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계획이 수정됐다. 79년 들어선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 정권은 공공 투자 위주였던 이전 계획을 백지화하고 민간 자본에 사업을 맡기기로 했다.

81년 런던 도크랜즈 개발공사(LDDC)가 설립됐다. 사업 대상은 3개 구 6백50만여평. LDDC는 민간 개발업자에게 프로젝트 선택과 디자인 결정권을 주었다. 공사 기간인 81년부터 98년까지 민간에서 76억5천8백만파운드(약 15조8천억원)를, 정부가 18억5천9백만파운드(약 3조9천억원)를 투자했다.

지역 재생을 위해 조성한 기반 시설만 해도 도크랜즈 경전철 22㎞와 고속도로, 작은 공항인 런던 시티 에어포트, 지하철 주빌리 라인 연장선 등 여럿이다. 99년 12월 개통한 주빌리 라인 연장선 16㎞(12개 역)에는 32억파운드(약 6조6천억원)가 투자됐다. 돈이 너무 든다는 비판도 많았으나, 이제는 잠자던 런던 동부를 깨어나게 한 지하철이라고 칭찬받고 있다.

81년 3만9천여명이던 도크랜즈의 상주 인구가 98년 8만3천명이 됐다. 일자리 수도 2만7천에서 8만5천으로 늘었다.

복합 타운이 된 도크랜즈의 업무.상업 중심지는 캐너리 훠프 10만평이다. 거점 중의 거점인 셈이다. 버려졌던 부둣가가 전국에서 고층 건물이 가장 밀집한 곳으로 탈바꿈했다. 오피스 빌딩 열일곱 동, 두 개의 상점가, 국제 회의장, 경전철 역과 주빌리 라인 역이 있다. 홍콩 상하이 은행(HSBC).시티 그룹.뉴욕 은행.바클레이 캐피털.리더스 다이제스트.맥그로 힐 출판사 같은 거대 기업들이 입주했다. 낮 인구 5만5천명이다.

캐너리 훠프는 실패했다가 되살아난 재개발 사례로도 유명하다. 뉴욕 배터리 파크 시티 건설에 참여한 캐나다의 부동산 개발회사 올림피아 앤드 요크(O&Y)가 주관했으나 부동산 경기 침체로 인한 재정난과 사무실 유치의 어려움 때문에 93년 부도를 냈다. 캐너리 훠프는 재개발 실패의 상징이 됐다. 그러다 96년에 O&Y 사장 폴 라이히먼이 사우디 왕자 알 왈리드 등을 동원해 국제 컨소시엄을 구성, 사업을 다시 인수하면서 개발이 급진전했다.

라이히먼은 캐너리 훠프 그룹이라는 회사를 통해 개발과 임대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 회사의 하워드 셰퍼드 이사는 "임대 공간 23만평 중 89.4%가 차 있으며, 지난해 수입이 1억4천9백만파운드(약 3천69억원)"라고 했다.

도크랜즈의 성공을 템스 강변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계획이 밀레니엄 프로젝트다. 문화.위락 시설 등을 배치하는 사업으로, 대표적 성과는 99년 템스 강 남쪽 그리니치에 들어선 밀레니엄 돔과 사우스 훠프의 테이트 모던 뮤지엄이다.

베를린 포츠담 광장 재개발도 주변 지역 발전을 위한 거점으로 계획됐다.

2차 대전 때 집중 폭격을 받은 이 광장은 동서 베를린을 가르는 장벽이 지나가는 바람에 버려진 곳이 됐다. 주변의 땅은 원래 개인들 소유였으나 장벽 때문에 권리를 포기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베를린 주정부가 사들였다. 다임러 사장이던 에드차르트 로이터는 이미 87년부터 이곳을 "상징적인 의미에서"개발하겠다고 공언했다.

베를린 주정부가 약 2만평의 땅을 팔기로 다임러와 계약을 한 것은 장벽 붕괴 이틀 전인 89년 11월 7일이었다. 장벽이 무너지리라는 정보를 다임러에서 미리 알았느냐는 점이 한동안 이야깃거리가 됐다. 소니사는 91년 크게 오른 값으로 1만평의 땅을 사서 건설에 착수했다.

광장 일대 15만평의 재개발은 전적으로 민간에서 했다. 다임러 벤츠.소니.헤르티.아베베 등 네 기업이 함께 마스터 플랜을 세운 뒤 구역을 나누어 맡았다.

포츠담 광장의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한나로레 포보는 "이 광장의 화려함이 동베를린 지역의 활성화를 이끄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인근 라이프치히 광장의 저층 바로크 건물들도 재개발이 시작됐다. 몇 블록 떨어진 프리드리히가는 파리의 라파예트 백화점과 패션 브랜드 에스카다, 보석상 크리스티 등이 들어서 명품 거리로 변신하고 있다.

그러나 거점 역할을 낙관만 할 수는 없다. 베를린 주정부의 코넬리아 포츠카 국제담당관은 "포츠담 광장 평일 이용 인구가 7만명 정도인데, 법에 따라 오후 7시 이후와 공휴일엔 음식점 이외의 어떤 상점도 열지 못하기 때문에 이용자를 더 늘리기가 어렵다"고 했다. 24시간 7일 내내 살아 움직이는 도심 만들기가 여기선 쉽지 않다는 얘기다. 건축가 올리버 쿤도 "거점으로서의 포츠담 광장은 아직 섬 같은 위치"라며 "포츠담 광장 개발이 낙후한 동베를린 지역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다"고 했다.

신혜경 전문기자 <도시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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