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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사설

미국 스스로 사문화한 대북 제재 결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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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이 유엔 결의를 무시하고 북한의 무기 수출을 묵인해 줬다는 미 언론 보도를 접하며 우리는 미국이란 나라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상황 논리에 따라 국제사회의 합의 따위는 무시해도 좋다고 보는 나라가 미국인가. 북한 핵 폐기를 요구하는 근거로 미국이 내세워 온 대량살상무기(WMD) 비(非)확산 원칙은 입맛에 따라 늘이고 줄이고 할 수 있는 엿가락 같은 원칙인가.

지난해 10월 북한의 핵실험 직후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 채택을 주도한 나라가 미국이었다. 안보리 결의 1718호에 따라 모든 종류의 북한제 무기 수입을 금지하고, WMD 개발에 전용될 수 있는 자금의 북한 유입을 차단하는 의무가 유엔 회원국에 부과됐다. 북한 선박에 대한 해상검문에 초점을 맞춘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에 참여하라고 한국을 압박한 것도 미국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 정작 미국은 에티오피아에 대한 북한의 무기 수출을 용인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 뉴욕 타임스의 보도다.

안보리 결의에 따르면 미국은 에티오피아가 북한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하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한다. 하지만 이 무기가 소말리아 내 이슬람 테러 세력 소탕에 사용된다는 점 때문에 알고도 눈감아 줬다는 것이다. 미국 주도로 채택한 안보리 결의를 미국 스스로 위반한 꼴이다. 또 다른 나라가 북한 무기를 수입한다 해도 막을 명분이 없어졌다. 대북 제재 결의는 사문화(死文化)한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이 유엔의 결정을 무시한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냉전 기간은 물론이고, 탈(脫)냉전 이후에도 그런 사례는 많다. 이라크 침공도 그중 하나다. 물론 미국도 국익을 생각해야 한다. 어떤 선택이 국익에 맞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미국의 몫이다. 하지만 최소한 국제사회의 합의는 존중해야 한다. 자기 필요에 따라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오만한 태도로는 자발적 동의(同意)를 기대할 수 없다. 실용주의로 포장된 일방주의라는 비판만 높아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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