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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남기자의영화?영화!] 재일동포의 '낯선' 우리말 그래도 '우리'를 발견했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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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애들이랑 노방에서 문상 냈더니 바꿔주던데." "지난번에 공방 뛰느라 이번 달엔 휴대전화를 많이 썼어."

중학생 조카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을 곁에서 듣고 마음이 덜컥했습니다. 문상(問喪)? 아니 어쩌다 중학생들이 상가에 가는 일이 생긴 거지? 그리고 공방(工房)? 요즘 뭘 만드는 걸 배우나? 알고 보니 '노방=노래방' '문상=문화상품권'의 줄임말이랍니다. '공방 뛰다'는 공개방송에 간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참.'안습'(안구에 습기 차다. 한마디로, 딱하다)이나 '무개념 탑재'(개념 없다)처럼 단어 자체가 낯설면 신조어구나, 짐작이라도 하지요.

역시 언어의 세대 차는 대단합니다. 전 세계에 6000개나 된다는 언어 중에 그나마 제일 잘하는 게 한국어인데,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 자랑도 못할 것 같습니다.

최근에 저의 우리말 실력(!)을 자극한 것은 다큐멘터리 '우리학교'(상영 중)입니다. 조선학교, 즉 해방 이후 일본에 남은 동포들이 세운 교육기관의 학생들이 주인공이지요. 교사들 역시 이제는 일본에서 나고 자란 동포 2세, 3세가 많습니다. 이들의 말은 서울말도, 평양 말도 아닌 것이 참 독특합니다. 일본 말은 물론 아니고요. 그런데도 대충 알아듣는 것을 보면, 우리말임에는 분명하죠.

기분이 묘했습니다. 이런 학교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그 교실에는 '우리말과 글을 올바르게 배우고 늘 쓰자!'는 구호가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더군요. 일본 사회에서 우리말로 배우고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고 지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영화를 보면 조금이나마 짐작이 갑니다. 참으로 어렵게 대물림한 우리말이더군요. 한국 쪽과는 별 교류가 없었으니 말이 좀 다를 수 밖에요. 영화를 볼수록 이들이 우리말을 쓴다는 사실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말 하나에 친근감이, 말 하나에 지난 역사가, 말 하나에 타향살이의 고통이, 말 하나에 이 공동체의 자부심이 떠올랐습니다.

지난해 개봉했던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망종'을 보면서도 비슷한 마음이었습니다. 조선족 젊은 엄마가 아들을 타이르면서 "들어? 들어?"하는데, 전후 맥락으로 보니 "알아듣느냐"는 말이었습니다. 남편은 나쁜 짓을 저질러 감옥에 갔고, 주변에 남자라곤 흑심을 품은 자들뿐입니다. 혼자 김치를 팔아먹고 살면서 엄마는 아들에게 우리말 공부를 독촉합니다.

한반도에 살면서 우리말을 쓰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 잊고 있었던 게 많았던 모양입니다. '우리말'을 우리만의 말이라고 오만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돌아봅니다. 말이 변하고 없어지고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럽고 재미있는 현상입니다만, 저 멀리서 우리말을 쓰는 또 다른 '우리'와 만났을 때 말문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으면 합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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