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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시시각각

FTA - 경제 그 이상의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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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지갑만 두둑하다면 고민할 게 뭐 있겠는가. 비쌀수록 안전한 선택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터득한 내 경험칙은 '세상에 포도주만큼 정직한 것은 없다'고 일러준다. 사람의 혀는 거짓말을 못한다. 와인의 품질과 가격을 정확하게 일치시키는 소믈리에들의 감별력은 거의 예술에 가깝다.

요즘 프랑스 와인은 나의 선택 대상이 아니다. 가격과 품질 사이의 불일치가 너무나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1만원 정도면 살 수 있는 AOC(원산지 명칭 통제)급 와인이 한국에선 최소한 4만~5만원은 줘야 한다. 술집에라도 가면 7만~8만원으로 껑충 뛴다. 특파원 시절, 프랑스에서 즐겼던 것과 같은 급의 포도주를 몇 배의 값을 치르고 사려니 솔직히 속이 쓰리다.

해서 요즘 나의 선택은 주로 칠레 와인에 집중된다. 가격 대비 품질 수준이 비교적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세금과 유통마진 때문에 칠레 와인도 원산지보다는 물론 비싸다. 그렇더라도 몬테스 알파나 카르멘, 에스쿠도 로호 같은 와인을 3만원대에서 고를 수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래서일까. 칠레산 와인 수입이 해가 다르게 급증하고 있다. 2003년 237만 달러에 불과했던 칠레산 와인 수입액이 지난해에는 1339만 달러로 늘었다. 국내 수입 포도주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도 17%까지 올라갔다. 칠레 와인이 경쟁력을 갖게 된 데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한몫했다. 2004년 4월 양국 간 FTA가 발효되기 전 15%였던 칠레산 와인 제품에 대한 수입관세가 지금은 5%까지 내려갔다. 2009년에는 영(零)세율이 적용된다.

칠레와 맺은 FTA 효과는 포도주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먹는 돼지고기 삼겹살의 10%가 칠레산이다. 지난해 5433만 달러어치가 수입됐다. FTA 덕분에 칠레산 돼지고기에 대한 관세율이 2003년 26.2%에서 올해는 16.7%로 떨어졌다. 홍어도 그렇다. 진짜 흑산도 홍어는 요즘 구경하기 힘들다. 칠레산 홍어를 들여다 목포 앞바다에서 해수(海水)에 담갔다가 홍어회로 내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칠레에서 팔리는 자동차 4대 중 1대는 한국산이다. FTA 발효 이후 대(對)칠레 자동차 수출이 크게 늘었다. 2003년 2만2510대였던 수출 대수가 지난해 4만8925대로 급증했다. 시장점유율은 18.8%에서 25.7%로 커졌다. FTA의 '쌍방(雙方) 효과'다.

칠레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칠레산 '신의 물방울'을 삼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1만8000㎞나 떨어진 안데스 산맥의 정기(精氣)를 빨아들이는 것이고, 남미의 찬란한 햇살을 흡수하는 것이고, 태평양의 시원한 바람을 호흡하는 것이다. 칠레의 자연과 문화가 잉태하고 출산(出産)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과 파블로 네루다의 달콤한 시구(詩句)를 음미하는 것이다. 칠레 사람들이 한국산 자동차를 탄다는 것은 한국의 이미지와 브랜드를 소비하는 것이다.

미국과의 FTA가 타결됐다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뜻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소비하고 향유할 수 있는 기호와 취향, 이미지와 상징의 폭이 그만큼 확장됐다는 의미다. FTA는 단순한 경제적 효과에 그치지 않는다.

유럽연합(EU)과의 FTA 협상이 다음달 초 시작된다. EU와의 FTA는 칠레나 미국과의 FTA와는 또 다른 차원의 새로운 선택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다시 나의 선택 대상이 된 프랑스 와인들 앞에서 행복한 고민을 할 날은 언제 올 것인가.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