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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꿈나무] "딸은 12살에 결혼했단다, 로마에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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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딸은 아들이 아니다
비프케 폰 타덴 지음, 이수영 옮김
아이세움, 307쪽, 1만2000원, 중학생 이상

해박한 역사 지식을 가진 할머니가 손녀딸과의 정담(情談)을 통해 귀에 쏙쏙 들어오게 들려주는 '딸들의 역사'다.

"딸들의 역사라고! 역사에 굳이 아들.딸, 남녀를 구분한 필요가 있냐?"는 질문이 뒤이을 법하다.'딸은 아들이 아니다'는 자명한 말을 책 제목으로 잡은 이유도 이같은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다. 딸들이 아들과 똑같이 공부하고 사회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지 않다. 한국에서도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동안 쏟아져 나온 수많은 역사책 속에서 여성의 삶을 추적하기란 쉽지않다. 다수의 역사책이 승리자 남성을 기록한 탓이다. 여성에 대한 기록은 막대한 지참금을 지닌 영주의 딸이나 출중한 외모와 품위.지조로 남성들을 사로잡았던 여성의 얘기 정도다.

할머니는 고대 그리스.로마에서부터 현재까지 각 시대별로 정치사회 체제를 먼저 들려주고 그 안에서 소녀들의 생활상을 중심으로 얘기를 풀어나간다.

로마시대엔 여자 아이가 열두 살이면 결혼을 했다. 딸의 결혼은 아버지에게 아들 노릇을 할 사위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했다. 둘째 딸 부터는 아버지 맘대로 내다버릴 수도 있었다. 반면 그리스 아테네에서 소녀들은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봉헌식에 참가하거나 축제에서 성스런 보리를 담은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행진하기도 하는 등 공인된 바깥 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기존의 역사 책에 기록되지 않은 딸들의 이같은 행적을 저자는 어떻게 재구성해냈을까? 고대 그리스의 희곡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파르테논 신전의 장식이나 도자기에 아로새겨진 소녀들의 모습, '빨간모자와 늑대'같은 익숙한 동화 등이 모두 여성사를 재현해내는 훌륭한 사료로 활용됐다. 읽기에 편안하고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역사책이라는 책의 장점은 바로 이점에서 비롯된다.

"빨간 모자야, 숲속 할머니께 과자와 포도주 좀 갖다드리렴!""그레텔, 빵이 다 익었는지 보고 와!"등과 같은 동화 속 얘기는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중세 소녀들의 삶의 일단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엘로이즈와 아벨라르'같은 사랑 이야기에서 저자는 지적 탐구욕을 가진 여성이 당시 사회에서 어떻게 통제당하고 좌절해 나갔는지를 예리하게 읽어내고 있다.

이 책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관점 하나. 서사시 오딧세이에 등장하는 페넬로페, 레즈비언이라는 말의 어원이 된 레스보스 섬의 여류시인 사포, 신화 속에 등장하는 나우시카 공주와 예언자 카산드리, 그리고 근대 프랑스 혁명 이후 "여성은 자유롭게 태어나 남성과 동등하게 살아간다"는 유명한 글을 남긴 올랭프 드 구즈에 이르기까지.

화자인 할머니는 남성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거나 기득권을 위협한 당찬 여성들을 손녀딸에게 소개하며 의기투합한다. 책 중간에 실은 실감나는 그림과 동화, 토막 역사상식 등도 유익하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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