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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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 시대의 변화가 일찌기 이처럼 큰 폭으로 일어난 적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91년의 국내외 정세는 급변했으며 변화의 추세는 낙관과 비관의 극단적 전망속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다.
90년 독일 통일과 동구의 해체로 예고된 새 질서의 재편과정이 지난 한햇동안 소련의 붕괴와 고르바초프의 퇴장,그리고 EC 12개국의 통합조약합의 및 미소간 핵폐기라는 두개의 큰 흐름으로 요약되어 나타났다.
전자가 공산 독재체제의 붕괴와 해체,그리고 민족간의 분열과 분쟁을 대표하는 흐름이라면,후자는 통합과 화해의 신 질서를 창출하는 새 역사의 출발을 의미한다.
특히 91년 10대 국제 뉴스는 대체로 통합과 해체라는 두 흐름으로 요약될 사건들로 꾸며지고 있다. 캄보디아의 내전종식에서 중동평화회의 개막과 EC통합이 통합을 향한 신질서의 구축이라는 방향이라면 유고내전과 인도 총리 피살,소연방 소멸은 해체와 분열의 불길한 조짐을 암시하는 또 다른 역사의 흐름인 것이다.
국제환경의 변화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국내 사정도 남북간의 화해와 통합의 길을 구체적으로 모색하는 남북유엔 동시 가입과 남북합의서의 서명이 이뤄진 한해이고 비핵화 실현이 구체화되고 있는 시점이다. 화해와 통합의 큰 흐름이 시작된 한해다.
그런가하면 부정과 비리의 관행체계가 속속 드러나면서 기성체제가 불신과 매도의 대상이 되고 도덕과 규범이 무너지고 반인륜,무규범의 혼란이 극심했던 가장 부도덕한 한해이기도 했다. 부정의 관행체제가 무너지고 도덕과 규범이 해체되면서 정치·경제가 지리멸렬의 답보상태를 계속한 한해였다고 볼 수 있다.
정치는 아직도 권모술수와 흥정정치로 예측불허의 이합집산을 계속하고 멱살을 잡고 날치기 통과를 다반사로 벌이는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채 경제는 그 와중에서 곤두박질하면서 물가는 고삐가 풀리고 무역적자는 1백억달러를 넘어서는 우려할 형편에 까지 이르렀다.
화해와 통합의 세계사적 흐름을 외면한채 대립과 분열의 혼란과 갈등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지난 한해 우리의 자화상이 아니었던가.
국내외적으로 화해와 통합,그리고 혼란과 분열이 교차하는 불가측성의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가 설 자리,우리가 나가야할 방향에 대해 다시 한번 더 깊이 반성하고 다짐해야 할 역사의 분기점에 서 있음을 절감한다.
먼저 화해와 통합이라는 역사의 긍정적 흐름을 탈것이냐,아니면 분열과 혼란이라는 역사의 패자쪽을 택할 것이냐를 모두가 재확인해야 할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서지 않고 새 질서 새 역사의 밝은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가 화해와 통합의 편에 서야하고 혼란과 분열의 길을 차단해야 하는 노력을 부단히 보여야 할 것이다.
세계질서의 재편이라는 큰 흐름앞에서,남북간의 화해와 통합을 위한 역사적 사명앞에서 이른바 대권이라는 정치놀이는 얼마나 보잘것 없고 치기만만한 다툼이었던가를 우리의 정치가들도 이제 알 때가 되었고 새모습의 정치를 보일 때도 된 것이다.
총선·대선이라는 유례없는 정치과열의 선거해를 맞게될 내년을 앞두고 정치와 국민이 시대적 대세를 망각한채 소아와 얕은 이익을 좇아 동분서주한다면 우리의 장래는 다시 한번 더 구한말의 어두웠던 시대를 반복할 수 밖에 없다는 허망한 비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소련의 해체나 독일의 통일과정을 보면서 국가존립의 기반이나 통일작업은 이데올로기나 민족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를 수행하고 담당할 경제력에 있음을 지난 한햇동안 절감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과소비와 낭비벽을 청산하지 못했고 일하는 풍토마저 조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노사분규가 지난 3년에 비해 현격히 줄어 들었고 해를 마감하는 무렵에서야 일 더하기 운동이 사회적 공감대로 일기 시작한 긍정적 일면을 보였지만 그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입시부정·의원외유사건·페놀사건·수서사건 등에서 보아온 비리와 부정이 더 이상 생겨날 수 없도록 쐐기를 박는 단호한 조처가 없었음이 회한으로 남는다.
대통령의 임기말 시점에서 특히 공무원의 비리와 부정이 새삼 크게 부각될 것임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고 범죄와의 전쟁 속에서도 끊이지 않는 강력범의 출현과 숱한 미제사건들이 내년의 민생치안을 더욱 어둡게 한다.
천하통합과 천하대난이라는 두개의 상반된 흐름이 교차하는 세계사적 시점에서 우리가 어느 쪽 어느 방향을 택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혼란과 분열 보다는 화해와 통합의 대세를 선택하기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 또한 명백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인지,찬란한 민족의 대통합을 위해서 힘찬 발걸음을 내디딜 것인지,우리는 엇갈리는 불안과 기대속에서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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