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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7월 北 미사일 발사후 정상회담 타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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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남북 특사교환 원칙 합의했다 무산

2003년 2월 20일 베이징. 라종일 주영국 대사(그후 초대 국가안보보좌관ㆍ주일 대사)가 북측 인사와 접촉했다. 노무현 정부 출범 닷새 전이다. 극비리다. 당시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위기 수위를 한창 높일 때다. 북측 인사는 전금철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으로 추정됐다. 18일부터 베이징에 나와 있었다.

라 전 보좌관은 북측에 새 정부의 대북정책을 설명하고 남북 정상회담을 타진했다고 한다. 일각에선 라 전 보좌관 접촉 인사가 전금철보다 직급이 낮은 다른 사람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라 전 보좌관은 21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아직까지 그 부분을 얘기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그해 4월. 남북이 특사 교환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북측이 특사 교환을 제의해와 우리 측이 받아들이기로 잠정 결정했다고 한다. 북측의 이 제안이 라 전 보좌관의 북측 인사 접촉 결과인지는 분명치 않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당시의 특사 교환은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북핵 문제 해결 쪽에 무게가 실려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특사 교환은 무산됐다. 그 전에 논의가 시작된 북ㆍ미ㆍ중 3자회담 개최 문제와 맞물려 있었다.
3월 27일 워싱턴. 방미 중인 윤영관 외교부 장관은 미측으로부터 3자회담 개최를 검토 중이라는 입장을 전달받았다. 거의 같은 시각. 도널드 카이저 미 국무부 부차관보가 서울에 도착했다. 카이저는 토머스 허버드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3자회담에 대한 우리 정부 입장을 물었다.

노 대통령은 3자회담을 승인한다. 한국의 회담 참가보다 북핵 해결이 우선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 윤 장관은 다음날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에게 3자회담 개최를 용인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4월 23~25일의 3자회담은 미국이 북핵 해결의 틀로 정한 다자회담과 북한이 요구한 북ㆍ미 양자회담의 절충이었다. 정부 당국자는 “당시 정부는 3자회담 개최를 감안해 남북 특사 교환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세현 당시 통일부 장관은 남북 간 논의가 더 나아갔다고 주장한다. 정 전 장관은 “특사 파견 논의도 결국은 정상회담을 위한 것으로 표현이 다를 뿐 같은 말”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에 그런(정상회담 추진) 논의가 있었다”며 “북측이 제3국 개최를 제안했고 그러다 시들해졌다”고 설명했다.
특사 교환이 물 건너간 후 남북 정상회담 문제는 쑥 들어갔다. 남북 모두 그해 8월 시작한 6자회담에서 탈출구를 찾았기 때문이다.

정동영 통일, 김정일에 정상회담 첫 공식제의

2005년 6월 17일 평양 대동강 영빈관. 6ㆍ15 남북 공동성명 5주년 행사 참석차 방북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북한이 핵 보유를 선언한 지 넉 달 만이었다. 북한은 부시 2기 행정부가 폭정의 전초기지로 지목하자 맞불을 놓았다. 6자회담은 11개월째 표류 중이었다.

“핵 문제를 해결하고 남북 관계를 전면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남과 북의 이익은 물론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평화에 기여합니다.” 정 장관은 노 대통령의 구두 메시지부터 전했다. 정 장관은 일주일 전 워싱턴에서 열린 한ㆍ미 정상회담 내용도 소개했다. 이 회담은 정 장관-김정일 면담의 밑거름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노 대통령에게 북핵 문제의 확고한 평화적 해결, 핵 폐기 시의 경제 지원을 표명했다. “미스터(Mr.) 김정일로 불러 주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도 했다. 김정일은 정 장관에게 이 회담을 높이 평가했다. “부시 대통령 각하에 대해 나쁘게 볼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정 장관은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한다. 첫 공식 제안이다. 고위 당국자는 “정상회담의 시기와 장소는 북한에 맡긴다는 메시지였다”고 말했다. 김정일도 긍정적 답변을 했다. “(노 대통령을) 만날 용의가 있는데 좀 두고 보자. 임동옥(통일전선부 제 1부부장ㆍ2006년 8월 사망)을 통해 알려 주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정 장관은 이에 대해 “당시 면담에서 ‘적절한 시기에 서울에서 개최’한다는 2000년 6ㆍ15 때의 합의 내용을 수정, ‘가능한 한 이른 시일 내’에 서울이 아닌 김 위원장이 선택하는 ‘제 3의 장소’에서 회담을 개최키로 논의했다”고 설명했다. 남북 간에 정상회담 개최와 북핵 문제가 이처럼 깊이 논의된 적은 없었다.

8월 14~17일 서울. 8ㆍ15 민족대축전 참석차 북한 대표단이 방한했다. 단장은 김기남 노동당 비서. 임동옥 부부장도 함께 내려왔다. 북측 대표단은 15일 현충원을 참배하고, 17일 노 대통령을 예방했다. 이 기간 중 남북 정상회담 개최가 구체적으로 협의됐다. 정 장관ㆍ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 김기남ㆍ임동옥 간 4자 모임에서였다. 임동옥은 “머지않은 기간 내에 판단해 답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고위 당국자는 “당시는 정상회담의 날짜만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고 말했다.

9월 19일. 4차 6자회담이 북한의 핵 폐기 공약을 담은 공동성명을 내면서 정상회담 개최 분위기는 더 무르익었다. 그러나 뜻밖의 암초에 부딪혔다. 성명 발표 직후 미국이 대북 금융제재에 들어갔다. 미 재무부는 북한 돈 2500만 달러가 예치된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를 돈 세탁 우려 기관으로 지정했다. 세계의 금융 보안관이 김정일의 돈줄 죄기에 나선 것이다. 북한은 남쪽을 쳐다볼 겨를이 없었다.

남북 공식채널 통해 노 대통령 뜻 전달

2006년 7월 5일. 북한이 미사일 7발을 발사했다. 대포동 2호와 노동1호, 스커드C 등 장ㆍ중ㆍ단거리 미사일이 망라됐다. 미국의 방코델타아시아(BDA) 제재가 그 ‘표적’이었다. 북한은 다음날 “미국이 금융제재를 실시하면서 그를 통한 압박을 여러 각도에서 가중시켜 미사일 발사를 보류할 필요가 없게 됐다”고 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즉각 대북 제재 논의에 들어갔다.

7월 10일 평양. 후이량위(回良玉) 중국 부총리를 단장으로 한 친선대표단이 도착했다. 6자회담 수석대표인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부부장도 동행했다. 그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간 대화는 긴박했다. “(미사일 발사는) 중ㆍ조 양국의 우호에 반한다.”(우) “우리는 주권국가의 원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호와 원칙은 다르다.”(김) “우호는 마오쩌둥(毛澤東)ㆍ김일성 주석이 결정한 대원칙이다.”(우)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간다.”(김)
중국 대표단은 끝내 김정일을 만나지 못했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만 만났을 뿐이었다. 북한을 6자회담으로 끌어내려던 중국의 설득은 실패했다. 중국은 15일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에서 찬성표를 던졌다. 정부 당국자는 “미국은 BDA 문제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고, 중국은 후이량위 방북 후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정부가 다시 남북 정상회담 카드를 빼든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다른 정부 당국자는 “정부는 당시의 대치 상황이 지속되면 북한이 핵 실험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7월 20일께. 정상회담은 남북 간 공식 채널을 통해 타진됐다. 정부는 이 채널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으로 위기를 풀려는 대통령의 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남북 관계 소식통은 전한다. 북측은 당시 “상부에 정확히 전달하겠다. 시간이 필요하다. 기다려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은 화답하지 않았다. 10월 9일 핵 실험을 단행했다. 정부는 이에 앞선 4월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조명록 차수의 서울 방문을 제안했지만 북한은 응하지 않았다.

올 2월 13일 6자회담에서 북한의 비핵화 초기 조치에 합의하면서 남북 정상회담 개최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 7~10일 이해찬 전 총리가 방북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나면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하지만 정부 쪽에서 적극적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는다. 비핵화의 초기 조치 이행에 주력하는 분위기다. 이 전 총리 측은 방북 때 동북아시대위원회 간부도 함께 가길 희망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정부 쪽 입장을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노 대통령이 정상회담에 연연하지 않는 입장이라고 정ㆍ관계 인사들은 지적한다.

오영환·신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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