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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경제 짓누르는 '불확실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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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벌써 한 해의 마지막 달로 접어들었다. 거리엔 화사한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내걸리고, 백화점 진열장 속에선 여느 12월과 다름없이 산타인형이 넉넉한 웃음으로 손님을 부른다. 그러나 거리를 종종걸음으로 오가는 시민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다. 풍성한 세밑의 여유로움은 찾아보기 어렵고, 잔뜩 웅크린 어깨에는 고단한 삶의 피로가 묻어 있다.

월급쟁이 직장인들은 연말의 두툼한 보너스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고, 시장 상인들은 쌓아놓은 물건 사이에 앉아 공연히 스산한 날씨만 탓한다.

2003년의 연말 풍경은 이처럼 쓸쓸하다.

사상 최고의 수출 호황에도 불구하고 싸늘하게 식은 국내 경기에는 온기가 돌지 않는다. 연말 대목을 빌미 삼아서라도 경기가 조금은 나아질 법도 하련만, 한 번 꺼진 불씨가 다시 지펴질 기미는 보이질 않는다.

경기가 이미 바닥을 치고 회복세에 들어섰다는 정부의 장담은 이제 공허하다 못해 그 용기가 오히려 가상할 정도다. 한국 경제가 올해는 죽을 쑤겠지만 내년부터는 확 좋아질 것이라는 국내외 경제 예측기관들의 전망도 그저 하기 좋은 덕담처럼 들린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경제연구소의 소장 한 분은 "요즘 같으면 경제전망 수치를 믿을 게 없다"고 아예 드러내놓고 말한다. "정교한 경제예측 모델을 컴퓨터로 돌리면 주요 경제지표에 대한 예측치가 나오기는 하지만 계량화(計量化)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아 별 의미를 두기 어렵다"는 게 그 이유다.

계량화할 수 없는 변수가 많다는 것은 우리 경제에 영향을 주는 요인 가운데 수치로 측정하기 어려운 것들의 비중이 크다는 뜻이다. 컴퓨터는 숫자를 집어 넣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한다.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변수가 많은데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렵다면 경제전망은 애초에 불가능해진다.

대선자금 수사를 보자. 지난 대선 때 정치권으로 불법 유입된 돈을 가려내자고 시작한 검찰의 수사가 이제는 기업의 비자금을 캐는 쪽으로 번지고 있다. 그 바람에 기업 총수가 출국금지되고, 주요 기업의 자금담당 임원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되고 있다. 기업들은 이 판에 내년도 사업계획을 짜겠느냐고 볼멘 소리다. 이는 분명히 경제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계량화해서 컴퓨터가 알아듣는 수치로 나타낼 건가.

검찰 수사가 어디까지 번질지, 얼마나 깊숙이 파고들지도 알 수 없다. '원칙대로' 한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그 '원칙'이 지켜진 적이 없으니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파행을 거듭하는 정국도 경제에는 부담이다. 민생과 경제 관련 법안들이 국회에서 줄줄이 처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바뀌어 통과될지 모른다. 내년 총선까지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알 수 없다. 정치판의 변화무쌍한 기류를 무슨 수로 경제예측 모델에 담아낼 수 있을까.

이런 문제들이 모두 경제의 불확실성으로 남아 연말 경기를 짓누르고 있다. 이 불확실성은 단순히 경제예측 모델 속의 계량화할 수 없는 변수로만 남아있는 게 아니다. 경제를 움직이는 각 주체의 의사결정을 가로막고 있는 게 문제다.

대기업은 투자 결정을 미루고 시장 상인은 물건 주문을 늦춘다. 외국인 투자자는 한국 진출을 망설이고, 서민 주부는 낡은 세탁기를 바꾸지 못한다. 명퇴를 걱정하는 기업체 간부는 몸을 사리고, 직장을 찾지 못한 청년 실업자는 절망한다.

이 불확실성을 없애거나 줄이지 못하면 내년에도 경기 회복은 장담하기 어렵다.

"내년 총선까지는 어렵지 않겠어요?"

한 경제관료의 말이 귀에 박힌다.

김종수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