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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 바닥은 작은 사막/한라산경관 훼손실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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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분화구 안벽에 30여개 길 생겨/입산금지 전엔 취사·빨래까지/파헤친 등산로 비만오면 폭포
한라산 분화구 백록담.
수심을 알 수 없었던 신비의 호수는 벌써 두달째 바닥을 드러내 거북이등처럼 갈라져 있다.
5년전까지만해도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던 백록담 호수는 이제 바람이 불면 흙먼지가 날려 눈을 뜨지 못할 정도.
분화구 둘레 능선은 곳곳에 군락을 이뤘던 구상나무·향나무 대신 벌거벗은 흙과 돌더미뿐이며,호수로 내려가는 분화구 안벽도 산사태로 죽은 구상나무 원시림군락이 뼈만 앙상한 몰골로 변해있어 천고의 신비는 간데없고 황량한 「작은 사막」을 연상케 하고 있다.
86년 분화구안 출입이 금지될때까지 연간 20여만명의 관광등산객들이 오르내리며 분화구안 호수에서 밥을 지어먹고 심지어 목욕·빨래까지한 몰지각 때문에 분화구 안벽에는 2백여m 바닥까지 30여개의 크고 작은 길이 났다.
비만 오면 그 길이 물길이 되어 흙과 돌을 쓸어내리면서 산사태를 불러 안벽에 자생하던 구상나무·주목 등 원시림이 죽어버렸고 호수가 메워졌다.
서북벽 코스와 연결된 서북능선 1천9백50m 정상. 2백여평의 최고봉 주변은 풀 한포기 없고 남벽에서 올라오는 분화구 가장자리 능선 2백여평도 벌거숭이로 흙먼지 광장이 된지 오래다.
정상에 처음 올랐다는 등산객 김영일씨(50·경기도 안양시 관양동 620)는 『명산 한라산 백록담이 이지경으로 파괴될줄은 상상조차 못했다』며 『정상마저 풀한포기 없는 흙마당이어서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렇듯 서북벽코스가 복구불능 상태에까지 이르자 통행이 금지되면서 생긴 2.4㎞의 남벽코스도 심하게 파괴되고 있다.
원생상태가 잘보존된 지역이었으나 산을 파헤쳐 등산로(너비 1.5 m)를 내 주변 50∼1백m의 지표식물이 관광등산객들에게 밟혀죽는 등 크게 훼손돼버렸다.
특히 경사 60도의 1.4㎞ 구간은 돌계단이 무너져 길마저 찾기 힘들 정도이며 낙석위험으로 사고마저 우려되고 있다.
서북벽코스와 남벽코스로 갈라지고 영실코스와 어리목코스가 만나는 윗세오름. 해발 1천7백50m의 이 지역은 등·하산객들이 쉬어가는 곳이어서 한라산 피해지역중 피해면적이 가장 넓다.
휴게소앞 2천여평에 군락을 이루었던 불로초인 시로미·구상나무·주목·진달래 등은 관광등산객들에 의해 멸종되고 대신 흙마당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몰지각한 등산객들이 식사하고 남은 찌꺼기 등 쓰레기를 주변 1㎞안 숲속에 마구 버려 파리떼가 들끓고 악취가 코를 찌르고 있다.
주말이면 한라산을 찾는다는 임만복씨(48·제주시 이도동 320의 12)는 『몇년전만해도 윗세오름 서쪽 샘터주변에서 점심을 먹었으나 이젠 파리떼에 쫓겨 백록담 능선에 올라가 먹는다』며 『제모습을 잃고 있는 한라산을 살릴길이 없겠느냐』고 안타까워 했다.
천연보호 구역인 한라산의 생태계가 이같이 파괴된 것은 ▲산을 파헤친 43㎞의 등산로 개설 ▲등산인원의 무제한 허용 ▲일부 관광등산객들의 몰지각한 행위 등이 큰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제주전문대 고동희 교수(조경학)는 『천연보호구역에서 돌과 흙을 파내 돌계단 등산로를 만든 것이 자연파괴의 화를 불렀다』며 『이 때문에 비만오면 돌계단 등산로가 폭포로 변해 생태계 파괴를 가속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복구작업에 나선 제주도는 등산로의 경우 무너진 돌계단 정비 등 매년 같은 방법을 되풀이해 비가 오면 또 다시 유실될 것으로 보인다.
백록산악회 오광협 회장은 『등산로 보수를 외국같이 통나무나 침목깔기 공법을 써 항구적인 보전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한라산=신상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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