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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로없는 「쌀」 논의/최철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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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부의 각종 자문기관중 가장 기피대상이 되는 자리가 추곡매입가 및 매입량을 결정,건의하는 양곡유통위원회일 것이다. 주변에서 어찌나 말이 많은지 아예 전화받기조차 거절하며 의원직을 고사한 관계전문가들이 꽤나 있다.
나라 전체 살림살이를 생각해가며 한자리수 이내 추곡가 인상률을 논의하면 농민단체들로부터 사정없는 비판이 몰릴 것이고,농민소득보장 차원을 강조하면 세상물정 모르고 인기에만 영합한다는 관변의 따가운 눈총이 쏠릴게 뻔해서다. 작년까지 이 위원회에서 일을 해왔던 어떤 교수는 『추곡수매정책 개선을 위해 이번에는 내가 바른 소리좀 하겠다』고 했다가 새삼 「분위기」를 거스르기 어려움을 깨달은 탓인지 원고청탁마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농촌경제 본질외면
그런저런 이유로 추곡수매 정책논의는 더욱 움츠러들고 있다. 농촌경제를 어떻게 밝혀 나갈 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아직 껍질도 벗기지 못하고 있다.
농촌경제는 현정권이 안고 있는 가장 골치아픈 문제다.
고추파동·수세파동으로 이미 홍역도 치렀다. 무값이 폭락하면 밭을 뒤엎는등 농민들의 대정부 의사표시는 더욱 적극적이다. 25일 전국 일부 지역에서 나타난 농민단체들의 추수파업은 총선을 앞둔 6공의 입장을 매우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들의 강한 저항에 아랑곳없이 쌀수입개방은 어쩔 수 없는 세계의 흐름처럼 보인다. 국제적으로 가장 비싼 쌀을 먹고 있는데도 농가소득을 지원하는 돈보다 이자지급이 더 많은 양곡관리 기금의 누적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쌀소비는 줄어드는데 추곡수매 요구량은 늘어나고 보관창고는 재고미가 넘쳐흐른다.
거기에다 추곡수매 국회동의는 정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야 어느쪽도 농촌선거구의 표를 잃지 않을 심사로 정부안을 흥정하려 든다. 이렇게해서 우리는 오로지 자기입장만을 따지는 나머지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보는지 모르게 돼있다.
수매가는 매년 올라도 시장가격은 큰 변동이 없고 소비는 꺾이고 있다. 86년산 통일미 한가마(80㎏)에 2만원씩 바겐세일을 해도 팔리지 않는다. 이 쌀로 술을 빚고 과자를 만들어도 먹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가축사료용으로 쓰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를 냈다가 여론의 공격을 받았던 몇몇 관리들은 두번 다시 입도 뻥끗하지 못한다. 차라리 쌀이 썩어 쓰레기로 땅에 묻을 때까지 내버려두는 것이 신상에 가장 안전한 해결책이라고들 한다.
쌀보다는 햄버거나 프라이드 치킨을,숭늉보다는 콜라를 먹고 마시는 소비생활 패턴의 변화를 보면서도 우리는 선뜻 전환기적 대응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직 한 목소리만을 인정하려 하고 있다.
생산자인 농민단체들이 일반벼의 수매가를 15∼25%까지 인상을 요구하고 있는데 대해 도시 소비자단체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소비자들의 목소리는 어디로 갔는가. 언제쯤 「구색」을 갖출 수 있는가.
○전환기적 대응 미흡
수매가를 인상하면 농민소득이 늘어나지만 인플레 위협도 받는다. 반대로 값을 인하하면 쌀 소비감소세가 둔화되어 결국 농민에게 이익이 된다는 분석결과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추곡수매의 국회동의제는 여소야대 체제의 산물이어서라기 보다는 나라 재정을 무시한 선심책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일부지적을 받아들여 적절한 시기에 정치권 스스로 개선책을 마련할 계기가 있어야할 것이다.
국내 쌀시장 개방이란 현재 상황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해서 국제적 흐름에 관한 논의조차 봉쇄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지난 봄 주제네바 대사가 세계 경제환경에서 볼때 장차 한국 쌀시장 개방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를 말한 것에 대해 여론은 매우 공격적이었다. 그의 의견을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수용가능성을 검토하는 여유를 갖지못했다.
우리는 만일의 쌀시장 개방에 대한 적절한 논의를 통해 대응책을 이미 검토했어야 한다. 국회가 또는 농민단체들이 『쌀시장 개방 절대 반대』라고 결의한 것만으로는 공허할 뿐이다.
자율화·개방화시대에는 일사불란한 단선적 사고가 매우 위험하다. 달리다가 퇴로가 없으면 낭떠러지에 떨어지든지 자멸하는 수 밖에 없다. 주변환경변화에 따라 행선지가 달라지면 선로도 바꿔 달려야 하는 것처럼 정책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견해도 다양해야 새로운 선로를 모색하는데 도움이 된다.
○정책논의 활력필요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거북스러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정부는 지금까지 농어가 부채경감대책으로 1조원을 풀었으나 사채는 오히려 늘어난 현실을 놓고 도대체 국민의 세금을 어떻게 써야 할것인지에 대해서도 공개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자유로운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겉으로만 농민을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정치위선자를 가려낼 수 없다. 실명제실시의 당위성만이 강조됐던 시절 뒤에서는 이 제도의 실시를 극력반대했던 여당인사도 있었고 그에 못지않게 반대한 야당 정치인도 더 많았던 위선적 행태를 우리는 알고 있다.<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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