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피로스의 승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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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후대 제왕들의 우상이었다. 기원전 3세기 지중해 주변왕들은 위대한 정복왕을 자신의 역할 모델로 삼고자 했으며, '제2의 알렉산드로스'로 불리고자 했다. 북부 그리스 지방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Pyrrhus)는 대왕의 이미지에 가장 근접했던 전술가였다. 그는 로마 원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피로스는 로마와 결전을 앞둔 이탈리아 반도 그리스 도시국가 타렌툼의 용병으로 초빙됐다. 그는 2만여명의 병사와 20마리의 코끼리를 거느리고 지중해를 건너 로마군을 맞았다. 당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통일에 나서 승승장구하던 신생국. 이론과 경험을 겸비한 피로스는 두차례에 걸쳐 로마군을 물리쳤다. 첫 전투는 넓은 지형에서 이뤄져 코끼리를 동원한 피로스가 대승을 거뒀다. 피로스는 코끼리를 요즘의 탱크처럼 활용하는 데 명수였으며, 로마인은 이때 코끼리를 처음 봤다. 로마군은 이를 교훈 삼아 두번째 전투에선 좁은 지형에서 사투를 벌였다. 양측의 사망자가 1만명에 이르렀다. 피로스 휘하 장수들도 몇사람 희생됐다.

마침내 로마 병사들이 퇴각하고 피로스의 병사들이 환호를 질렀다. 그러나 막상 피로스는 심드렁하게 측근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기는 것도 좋지만 이런 승리를 다시 거두었다가는 우리도 망한다"라고. 실제로 피로스는 세번째 전쟁에서 로마군에 패했으며, 반토막난 병력을 데리고 귀국한 직후 스파르타와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이후 '피로스의 승리'란 '실속 없는 승리''상처뿐인 영광'과 동의어가 됐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본 피해 가운데 사망자는 1백38명이었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자랑할 만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종전 선언 이후 이틀에 한명꼴로 사망자가 늘어나 8월 26일 전후 사망자 수가 전쟁 중 사망자 수를 넘어섰다. 이라크 저항세력이 확전을 선언한 지난달엔 사망자 수가 이틀에 다섯명꼴로 늘어나 79명이 숨졌다. 피해는 동맹국 민간인들로 확대돼 한국인 두명이 11월 마지막 사망자로 기록됐다. 혹시 피로스의 승리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이야기'에서 피로스에 대해 "모든 것을 갖추었지만 인내심만은 갖지 못한 사나이"로 평가했다. 인내심은 곧 치밀한 계산과 신중한 결정일 것이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