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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20돌 '성년 여연'의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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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국여성단체연합 창립 20주년 및 99주기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23회 한국여성대회가 4일 서울 홍익대에서 열렸다. 전북지역 회원들이 노란 우산을 펼치며 인사하고 있다. [사진=박종근 기자]

#장면1. "여성단체 대표는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되는 지름길이냐." 지난해 11월 15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 관계자들은 한 시민단체 관계자의 공격적인 질문을 받았다. 여연이 주최한 '여성연합의 비전과 새로운 운동방식 모색을 위한 심포지엄'에서다. 여연 측은 이 비판에 대한 즉답을 피했다.

#장면2. 성매매방지법 시행 직후인 2004년 10월 19일 성매매 여성 6명이 여연 사무실을 찾았다. 그들은 생계 대책과 함께 자신들을 '성노동자'로 불러 줄 것을 요구했다. 여연의 한 활동가는 "성매매 여성뿐 아니라 일부 영페미니스트와 여성학자들까지 성매매방지법을 비판해 너무도 당황했다"고 털어놓았다.

올해로 창립(1987년 2월 18일) 20주년을 맞은 여연이 처한 상황을 가늠케 하는 장면들이다. 여연은 그동안의 양성평등 운동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냈지만 최근에는 안팎의 비판에 직면해 있다. 단체가 권력화하면서 대중과 동떨어진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연 내부에서조차 시민단체의 정체성이 약화됐다는 자성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공감대 늘려 가겠다"=여연은 지난해 하반기 지역회원단체와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6개월간 모두 8차례의 워크숍을 열었다. 여기에서는 "여성운동이 위기에 처했다"는 얘기들이 나왔다. 여연이 이렇듯 집중적으로 워크숍까지 열어 가며 자기 진단과 방향 모색을 한 것은 이례적이다.

남윤인순 대표는 "운동 에너지를 지역으로 확산해 생활 밀착형 운동으로 집중할 때가 됐다"며 "여성운동이 그동안 여성 인권 쟁취를 위한 대변자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여성 개개인이 여성 친화적으로 정비된 법과 제도를 향유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법과 제도를 고치는 데만 힘써 실질적으로 그 제도를 누려야 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여연은 4일 오후 홍익대 체육관에서 '3.8 세계여성의 날'을 기념한 한국여성대회와 창립 2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기념식에 앞서 배포한 보도자료에서도 "관성과 기득권을 버리고 느리지만 소통하고 연대하는 운동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또한 평범한 여성들의 자발적 참여를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권력이 돼 버린 여연=여연이 최근 수년째 공격을 받는 것은 단체가 권력기구처럼 돼 버렸다는 점이다. 한명숙 총리, 지은희 여성부 장관, 이미경.이경숙 의원 등 여연의 대표들이 잇따라 정계로 진출한 것을 두고 하는 얘기다. 일부 여성학자와 영페미니스트들은 이런 여연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해 왔다.

실제로 여연 활동가와 회원단체 간부들은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0순위로 기용돼 "여성운동이 출세의 발판이냐" "특정 정당과 가깝다"는 등의 비난을 받았다.

비정부기구(NGO)의 기본적 역할인 비판의 기능이 약해졌다는 지적도 있다. 여연이 주도적으로 정책을 만들어 내면서 그에 대한 비판을 소홀히 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가장 큰 고민은 여성운동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다. 여연 대표를 지냈던 한명희 구로인력개발센터 관장은 "여성운동이 남성에 대항한 투쟁이 아니라 남녀가 공존하는 사회로 가기 위한 운동이란 점을 충분히 설득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성매매방지법 시행과 여성가족부 폐지 온라인 서명에서 보듯이 여성운동에 대한 반감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성학자는 "법제화 과정에서 대중의 힘을 업기보다 정치권을 움직여 성과를 이루는 운동방식에 문제가 있다"며 "대중이 함께하는 운동으로 변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여성학자는 "정부와 특정 정파와의 거리를 두지 않는 한 여연에 대한 대중적 신뢰를 회복하기는 힘들 것"이라며 "비판적 감시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moonk21@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여연=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면서 모인 21개 여성 단체가 1987년 2월 18일 발족 시켰다. 이후 20년간 진보적인 여성단체의 구심체로서 한국여성운동을 이끌었다. ▶모성보호 법제화▶성폭력.가정폭력.성희롱.성매매방지법 제정▶남북한 여성 교류▶보육운동▶호주제 폐지▶양성평등한 명절 만들기 등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한명숙 총리, 지은희 여성부 장관, 이우정.박영숙 전 의원, 이미경.이경숙.홍미영 의원 등이 여연 또는 여연 회원단체 대표 출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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