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잡기도 놓기도 어렵다/전육(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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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권력은 잡기도 어렵지만 놓기도 힘드는가 보다. 차기 대통령후보 지명을 둘러싼 민자당의 시도 때도 없는 힘겨루기를 보면서 아마 노태우 대통령의 심경이 그렇지 않을까 짐작된다.
대세론을 앞세운 김영삼 대표쪽이 시간이 감에 따라 기선을 잡는가 싶으면 민정·공화계가 한 목소리로 그렇지 않다고 손을 내젓는다.○궁금한 대통령 의중
한 쪽은 총선전 조기지명이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가고 다른 쪽에선 내각제 미련을 포기하지 않은채 총선을 통해 먼저 YS세가 조락하기만 고대하고 있다.
이 틈새에 대타를 꿈꾸는 사람들은 노대통령이 김대표를 멀리해 주면 「나도…」하는 몸짓을 하고 있다. 도대체 뭐가뭔지 모르게 돌아가는 판에 정작 열쇠를 쥔 노대통령은 포커페이스다. 어떤 때는 김대표에게 한점쯤 접어주는 것 같기도 하고 이따금 직·간접으로 발목을 걸기도 한다.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김대표를 소개하는 의전절차를 직접 지시했지만,여론에 탄력이 붙자 그것이 별게 아니라고 격하시키는 것이 한 예가 될성 싶다. 그렇다고 대타를 키워 김대표와 겨루게하는 구체적 준비 기미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런 노대통령의 의중은 구구한 억측과 함께 이해당사자들에게 기대와 불안을 안겨주고 있다. 그러나 몇가지 징후를 볼때 노대통령이 아직도 백지상태에서 고민하고 있는게 아니냐는 것이 측근들의 관측이다. 다만 권력승계에 관한 대통령의 심리상태를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이를테면 지나치게 술수를 부리면 모가 나고 소리가 날 것이다,그렇다고 너무 일찍 건네주면 권력의 속성상 자신이 먼저 떠내려갈지 모른다,반대로 순리를 어기고 다른 고집을 관철하려면 임기말이 만신창이가 되고 사후보장이 어려워진다는등….
그러나 대통령후보 결정을 둘러싼 민자당의 이같은 속사정은 국민의 관심거리가 될지언정 절차나 행태면에서 지지를 받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국민이 임기동안 위임한 권한과 책임을 마치 밀실거래하듯 하는 인상에 반발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 내각제 논의가 밀실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본래의 평가보다 반발이 앞섰던 것처럼.
정치권력의 획득과 유지,이양과정은 결코 사인간의 밀실거래 대상이 될 수 없다. 설혹 1공화국에서 5공까지의 권력획득이 비민주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권력은 항상 최후순간까지 불확실성속에서 긴장하는 것이라는게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더라도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임기말의 권력누수가 자연현상이라면 리더십의 교대도 이제 공개화·제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러가는 지도자는 사후를 걱정해 인적·제도적 안정장치를 강구하고 2인자는 기약없이 초조한 낙점을 기다리는 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대통령의 입장차이를 분석해 보는 것은 권력승계의 새로운 모델창출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먼저 전 대통령은 정변으로 집권한데다 단임의 선례가 없어 수 없이 꼭 물러난다는 말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고 국민뇌리엔 쿠데타의 가능성이 시종 떠나질 않았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하등 그럴 이유가 없다.
○두 사람의 입장 차이
또 전 대통령은 대통령 선출 방법을 놓고 끊임없이 외부세력의 도전과 국민저항을 받았으며,5공 출범의 원죄때문에 숙명적으로 증오와 보복하려는 세력이 있었다. 노대통령은 직선으로 이런 질곡을 벗어났다.
전대통령은 끝까지 권위주의 권력을 행사,대통령 당선이 확정될 때까지 노대통령을 미미한 2인자 자리에 붙잡아 두었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끝머리에도 권위주의적인 당지도는 없을 것 같다.
외교정책도 다르다. 전대통령은 냉전의 끄트머리에서 안보를 앞세운 우방국외교에 전념했으나 노대통령은 소련과 동구의 대변혁속에 적극적인 통일·경제개방외교를 주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경제 역시 차이는 있다. 전대통령은 3저의 호조건속에서 선거공약의 부담이 없어 단기적 여론에 구애받지 않고 물가안정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반면 노대통령은 흑자 경제를 물려받고도 공약부담,용인실패로 임기 내내 안정된 경제정책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권력행사 스타일도 판이하다. 전대통령은 13회나 대소자리를 일방적으로 물려준 노대통령을 만만하게 본 나머지 퇴임직전까지 인사권,이권사업 결정권을 행사하고 스스로 퇴임후의 장치까지 마련했다가 혹독한 시련을 자초했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여소야대,3당합당을 거치면서 민주화작업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독주하는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레임덕은 앞당겨,심각하게 올지도 모른다. 연말에 행사할 민자당공천,개각,군수뇌인사를 마치고 나면 저절로 힘이 빠질 것이란 관측이다. 권력철새들이 새로운 강자를 찾아 떠나는 분위기에서 후계지명권만 내년 총선후까지 움켜쥐고 있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물음이 그래서 나온다.
○높아진 국민의 눈
이렇게 볼때 노대통령의 권력이양은 전대통령의 방식과 달라야할 뿐아니라 그 구체적인 방안이 야무지게 모색되지 않을 수 없다.
후계지명권은 전대통령식으로 행사하고 사후보장은 훨씬 더 안전해야 한다는 것은 두마리 토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권력을 보는 국민의 눈과 인식이 바뀌었다. 국민소득이 3천달러에서 5천달러로 뛰어오른 지난 3년반동안 우리는 자유의 단맛과 어려움을 두루 겪었다.
민주화의 만개와 경제침체를 동시에 목격했고 독재도,무능도 아닌 강력한 리더십에 목말라있다.
정권교체와 이양이 지도자의 개인적 이해때문에 왜곡되는 불행한 선례가 되풀이되어선 안된다. 물러가는 정권과 새정권의 갈등은 한번으로 족하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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