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길' '집' '국수(國手)' 등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또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색했던 그가 왜 갑자기 아이들 한자 학습서로 간주되는 천자문을 붙잡은 것일까.
그 궁금증은 서문을 읽는 순간 해소된다. 김씨는 "(천자문은) 옛 사람들이 한문을 배우는 데 첫걸음으로 여겼던 으뜸본 바탕책이었다. 한글로 따지면 '가갸거겨'와 같고 셈본으로 말하면 '구구단'과 같다"고 말한다.
작가는 4자 1구로 2백50구, 총 1천자로 구성된 '천자문'의 현대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2백50구를 일일이 풀이하는 것은 물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오늘의 관점에서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역사.자연.도덕 등을 두루 포괄한 원전을 지구화 시대인 21세기로 '시간 이동'한 셈이다.
일례로 그는 천자문 첫 구절인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거칠다(天地玄黃 宇宙洪荒)'에서 현대 과학의 한계를 얘기한다. 모든 걸 풀어낼 것으로 기대됐던 과학이 실제론 꽃 한송이 피는 인과율 하나도 명쾌하게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나는 사라져 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라고 읊었던 작고 시인 박정만(1946~88)의 종명시(終命詩)도 인용한다.
또 '추위가 오면 더위는 가니, 가을에는 거둬들이고 겨울에는 갈무리하여 둔다(寒來署往 秋收冬藏)' 같은 구절에선 계절의 분간이 사라진 인류의 대마루판(일의 성패가 갈리는 마지막 판)을 진단하는 등 현대 문명의 구석구석을 훑는다.
우리말의 아름다운 운율을 살린 작가 고유의 문체가 생생하며, 한국사의 인물과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소개도 흥미롭다.
작가는 다섯살 때 할아버지에게서 처음으로 천자문을 배우는 등 전통적인 유가(儒家)에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다. 책에 나오는 천자문도 그가 직접 썼다.
박정호 기자
*** 바로잡습니다
12월 2일자 21면 '천자(千字) 속에 담긴 문명 비판' 제목의 기사 중 '한래서왕(寒來署往)'의 '서(署)'는 '서(暑)'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