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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字'속에 담긴 문명비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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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만다라'의 소설가 김성동(56)씨가 자신의 이름을 붙여 '천자문(千字文)'을 해설한 '김성동 천자문'(청년사刊)을 냈다. 형태와 내용 모두 독특한 책이다. 유려한 에세이집같은가 하면 한편으론 신랄한 문명 비평서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하늘의 섭리 땅의 도리'라는 부제를 단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장편소설 '길' '집' '국수(國手)' 등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또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색했던 그가 왜 갑자기 아이들 한자 학습서로 간주되는 천자문을 붙잡은 것일까.

그 궁금증은 서문을 읽는 순간 해소된다. 김씨는 "(천자문은) 옛 사람들이 한문을 배우는 데 첫걸음으로 여겼던 으뜸본 바탕책이었다. 한글로 따지면 '가갸거겨'와 같고 셈본으로 말하면 '구구단'과 같다"고 말한다.

작가는 4자 1구로 2백50구, 총 1천자로 구성된 '천자문'의 현대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2백50구를 일일이 풀이하는 것은 물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오늘의 관점에서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역사.자연.도덕 등을 두루 포괄한 원전을 지구화 시대인 21세기로 '시간 이동'한 셈이다.

일례로 그는 천자문 첫 구절인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거칠다(天地玄黃 宇宙洪荒)'에서 현대 과학의 한계를 얘기한다. 모든 걸 풀어낼 것으로 기대됐던 과학이 실제론 꽃 한송이 피는 인과율 하나도 명쾌하게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나는 사라져 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라고 읊었던 작고 시인 박정만(1946~88)의 종명시(終命詩)도 인용한다.

또 '추위가 오면 더위는 가니, 가을에는 거둬들이고 겨울에는 갈무리하여 둔다(寒來署往 秋收冬藏)' 같은 구절에선 계절의 분간이 사라진 인류의 대마루판(일의 성패가 갈리는 마지막 판)을 진단하는 등 현대 문명의 구석구석을 훑는다.

우리말의 아름다운 운율을 살린 작가 고유의 문체가 생생하며, 한국사의 인물과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소개도 흥미롭다.

작가는 다섯살 때 할아버지에게서 처음으로 천자문을 배우는 등 전통적인 유가(儒家)에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다. 책에 나오는 천자문도 그가 직접 썼다.

박정호 기자

*** 바로잡습니다

12월 2일자 21면 '천자(千字) 속에 담긴 문명 비판' 제목의 기사 중 '한래서왕(寒來署往)'의 '서(署)'는 '서(暑)'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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