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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실장 야망 모르고 천거 비판「정치 관찰자」로서 유신 지켜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청와대 본관에 근무했던 Q씨의 증언.
『74년8월 차실장이 청와대에 들어온 지 얼마 안돼서 일거예요. 하루는 차실장이 본관 1층에 있는 면담대기실에서 2층 김실장방으로 인터폰을 했어요. 「내가 지금 1층 대기실에 있는데 여기서 김실장을 좀 뵙고싶다」라고요.
속이 빤히 보이더라고요. 1층으로 내려오게 해 기선을 잡으려는 거죠 뭐. 그러나 어디 김실장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인가요. 비서관에게 「지금 무척 바쁘니까 올라오시도록 하라」고 하더라고요. 차실장은 할 수없이 올라왔어요.』
Q씨가 들려주는 스토리 중엔 「전화 힘 겨루기」도 있다.

<「대기실 면담」 요청>
『차실장이 김실장하고 통화하고 싶을 때 경호실장비서관이 비서실장비서관에게 전화를 하잖아요. 서열상 비서실장이 경호실장보다 높으니 당연히 경호실장이 먼저 전화에 나와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얼마 지나자 거꾸로 되는 거예요. 경호실장 비서관이전화기를 들고 있다가 김실장이「나 김실장입니다」라고 하면「실장님 잠깐 기다리십시오」하고 자기 상관인 차실장을 바꾸는 거죠.
눈치를 보니까 차실장이 그렇게 하도록 시키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그 비서관에게「다시 한번 그따위식으로 하면 통화 못할 줄 알아」라고 소리를 질렀지요. 그게 통했는지 다음부터는 순서가 제대로 되더라고요.」
이런저런 증언을 모아보면 『김정렴 실장이었더라면…』이라는 가정법이 어느 정도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적어도 김계원 실장 시절만큼 차실장이 휘두르지는 못했을 거란 분석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몇 군데 허전한 구석도 있는 듯하다. 김실장은 스타일이 그렇듯 자기몸가짐은 추스렸지만 자리를 무릅쓰고 대통령에게 나서 경호실장의 문제점을 간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충실한 도승지이긴 했으나 대사간의 일은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김실장은 바로 차지철을 경호실장으로 천거한 장본인이라는 대목도 주목거리다. 결과론이지만 사람을 잘못 고른 책임도 못본척 할 수 없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김실장의 재임 중에도 차실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조짐이 있었다고 한다. 차실장은 경호실 식당에 여당이나 야당정치인을 모아놓고 박대통령이 참석하도록 유도해 은근히 자신의 영향력을 뽐낸 적이 있곤 했다.

<"사람 좋게 봤는데">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몇백m를 걸어 내려가 경호실 식당에 가는 식으로 체통의 모양새가 구겨져도 김실장은 손을 쓰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다.
김실장의 설명은 이렇다.
『사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일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각하가 그러시는데 어떻게 합니까. 차실장이 정치에 손댄 것도 그래요. 정치문제는 각하가 나보다 훨씬 정보도 많고 판단도 정확하므로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라고 생각한 거죠.
그리고 내 나름대로 생각도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차실장의 국기 강하식에 가고 경호실 식당에 가 밥을 먹어도 나만은 지켜야겠다 고요. 그러면 그게 무슨 뜻인지 다른 이들이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요. 내 딴에는 무언의 시위였어요,』
「차실장추천」대목은 정말 아이로니컬한 것 같다. 컴퓨터처럼 정확한 김실장이 천거한 사람이 나중에 그렇게 발전했으니 말이다. 먼저 김실장의 설명.
『난 정말 그 사람을 좋게 봤어요. 나뿐 아니라 박대통령 사위 한병기씨도 그를 추천했다고 들었어요.
차의원(당시 4선)은 금전적으로 깨끗한데다 신앙심이 투철하고 학구적이며 게다가 무술도 뛰어나서…. 박대통령 곁에서 수신제가를 잘할 줄 알았죠.』
이 부분에 대해 청와대출신으로 장관을 지낸 모씨는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그땐 그런 판단이 가능했는지 모르죠. 그러나 경호실장자리의 특성으로 보아 대상자의 정치성 여부를 면밀히 따졌어야합니다. 김실장이 조금 더 정치적이었더라면 차의원이 숨기고있는 발톱을 눈치챘을지도 몰라요. 차의 정치적 야망 말이에요.』

<어련히 알아 하실까>
김정렴론을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짚어야할 부분은 그의 「정치적 소극성」일게다. 경제에 있어 그는 주재자에 버금갔지만 정치는 목격자에 머물렀던 것 같다. 유신·윤필용 사건 등 중요한 정치고비마다 그는 첫 번째 관찰자였지만 제도운용·시국상황에 목소리를 낸 흔적은 별로 없다.
유신만해도 그는 생성과정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한다. 그가 털어놓는 일화.
『72년5월 평양에 다녀온 이후락 정보부장이 박대통령한테 보고하는 자리에 나도 있었습니다. 유신아이디어가 구체적으로 등장한 것은 그때였지만 박대통령의 머리 속에 유신이 싹튼 것은 훨씬 이전이었죠.
71년5월 박대통령이 7대대통령에 취임한 후 얼마 안 있어 유럽에 나가 있던 장성출신의 대사 한사람이 박대통령을 만난 일이 있지요. 그 사람은 프랑스의 드골이 긴급조치권을 가진 강력한 헌법을 만들어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그 대사가 돌아가자 박대통령은 나더러 「김실장, 드골 헌법을 좀 구해주세요」하세요. 그래서 서울대에서 구해 갖다드렸죠. 박대통령은 「자유국가에서도 대통령제를 이렇게 하는 경우가 있군요」하더라고요.
비단 이 일 뿐 아니라 박대통령은 국회의원·외교관들로부터 스페인 프랑코,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헌법, 대만의 총통제 등에 관해 여러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때부터 유신이 서서히 만들어지기 시작한 거죠. 실제 연구작업에서 나는 박대통령과 정보부 사이 연락을 맡았습니다.』
김씨는 지금 『유신은 운용이 잘못됐었다』는 생각을 갖고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후보가 선거에서 『나는 누구를 지지한다』는 말을 못하게 된 것이나 「장충체육관선거」에서 박대통령 한사람만 나와 정치가 「2류쇼」로 전락했다는 점등이 그것이다.
그는 그러나 야당의 저항, 학생데모 같은 문제까지 양보하지는 않고 있다. 그는 『나라안보가 백척간두에 놓였던 만큼 그런 시국문제에 대해선 박대통령의 철학과 소신이 옳았다』는 시론이다.
『그래요. 나는 이른바 시국대책회의에서 별로 발언을 하지 않았습니다. 시국문제는 원래 정보부나 검찰·문교부소관이라 내가 나설 입장이 아니라고 판단했죠. 그리고 박대통령이 워낙 잘 알고 있으니 내가 낄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치회고록 준비중>
입장도 입장이지만 소신이 박대통령과 똑같았어요. 「야당과 학생이 왜 좀더 참아주질 못하나」라는 거였죠. 보세요. 나라가 좀 어려웠습니까. 김신조·푸에블로·땅굴·문세광·주한미군 철수에다 월남패망까지 있었잖아요.』
그런 김씨에 대해 유신비판론자들은 가시 돋친 의견을 제시하고있다. 『박대통령이 3선 임기가 끝나기로 되어있던 75년에 순조롭게 정권을 인계하고 안보를 다졌더라면 고도성장열차는 더욱 힘차게 달렸을 것』 『유신 때 정치가 뒤틀리는 바람에 5공, 6공 내내 정치적 혼란이 경제력을 파먹고 있지 않느냐』는 내용이다.
논란이 어느 쪽으로 가든 김정렴 전비서실장(67)은 여전히 누구보다 목소리가 낮지만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박정희교 신도다. 그는 『내 인생에서 지극히 좋고 지극히 나빴던 두 가지 만남이 있었다. 45년8월 일본군견습사관시절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을 맞은 일은 끔찍했지만 박대통령을 만난 것은 축복 같은 거였다』고 말한다.
10·26후 5공이 박대통령을 향해 돌을 던진 것에 대해 그는 『한이 맺힌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있다. 『정치적 과오를 따지는 거야 옳은 일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무분별하게 매도할 수 있느냐』는 주장이다.
김씨는 회고록 『한국경제정책 30년사』에 쓰지 못했던 정치비화를 모아 지금 제2의 회고록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내가 죽은 후 아들이 출판토록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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