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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톱에 숨은 경영학] 당신은 ‘열고’인가 ‘딱점’인가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못 먹어도 고!” “폭탄.” “쌌다.” 명절 때마다, 집안마다 한번씩 나오는 소리다. 지난 70여 년 동안 화투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서민적인, 그리고 가장 효율적으로(?) 시간을 죽이는 놀이였다. 이코노미스트가 설을 맞아 고스톱에 숨어있는 ‘경영 코드’를 찾아냈다.


어느 시인이 그랬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중략)’ 그러자 다른 시인이 그 작품을 패러디해서 이렇게 썼다. ‘사람들 사이에 사이가 있었다 / 그 사이에 있고 싶었다 /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중략)’

나는 문학을 해설하는 사람이 아니라 창작을 하는 사람이므로, 그리고 시(詩)는 내가 이러저러 가지고 놀 물건이 아니므로 주제넘은 언급이 될 것이겠지만, 앞의 ‘섬’이 따스한 인간애가 숨 쉬는 공간쯤 된다면 뒤의 ‘사이’는 소통의 부재로 인한 고립의 공간쯤이 아닐까 짐작한다.

무슨 공무원 시험지 해설 같은 소릴 늘어놓고 말았는데 집어치우기로 하고, 어쨌거나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문제다. 상대가 친구든 가족이든 직장상사든, 그 사람과 나의 ‘사이’는 상대가 다가오고 싶어하는 따뜻한 섬인가, 아니면 고독한 왕따의 공간인가?

‘사이’ 채워주는 따뜻한 섬

고민할 것 없다. 주고받을 말이 궁해서 어색하게 마주앉아 손톱 뜯고 있지 말고 벌떡 일어나 이불장 구석을 뒤져보자. 군데군데 다리미의 화인(火印)이 버짐처럼 피어있는 낡은 군용 담요가 있을지니, 지체 말고 그 담요를 꺼내들고 와서 그와 나, 혹은 그들과 나를 곤혹스럽게 했던 그 ‘사이’에 떡 펼쳐놓자. 그리고 이렇게 말하라. “한판 돌릴까요?”

상대가 누군들 무슨 상관이랴. 아버지와 아들도 문제없으며 선후배, 조카 삼촌, 동서지간이라도 좋다. 우선 ‘기계’ 설비부터 점검하자. 솔, 매화, 벚꽃, 난초, 모란, 오동 따위가 철 맞춰 제때 피었는지 마흔여덟의 구색은 갖췄는지 확인했다면 뒤죽박죽 잘 섞어 패를 돌리자.

손바닥에 세워 펴든 일곱 장, 그림이야 아름답지만 그 이름이 왜 화투이겠는가? 이제부터 당신은 사교장의 초대손님이 아니라 전장에 나선 검투사다. 칼 대신 꽃(花)을 들고 싸우는 투(鬪) 화객(花客)이다.

밤일낮장. 아니 낮일밤장이라도 상관없다. 당신의 패가 형편없다면, 선(先) 가리기가 끝나기 무섭게 이렇게 말하라. “첫판은 연습이야.”

‘그런 법이 어딨어?’라고 시비 거는 이가 있거든, 연극도 리허설이 있고 프로야구도 시범경기가 있으며 대입수능 시험도 모의고사가 있고, 하다못해 재건체조도 준비운동이 있으며…. 그 정도 늘어놓으면 ‘알았어, 알았다’라고 손사래를 칠 것이다.

연습 판이 끝났다. 이제 ‘판’의 크기를 정할 차례. 점 백이냐, 점 오백이냐, 아니면 점 천이냐…. 그것은 앞으로 행해질 행사의 규모와 격(格)을 정하는 중요한 룰이다. 당신은 기껏 새총에 막대기를 무기라고 들고서 골목싸움이나 하려고 판에 끼었는데, 전장(戰場)의 규모가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격돌하는 ‘요동벌판’ 급(級)으로 정해지거든 배탈이나 일진을 핑계로 가차없이 판에서 나오라.

화투를 치는 내내 주머니 속의 얇은 지갑 때문에 집에 갈 찻삯까지 털릴지 몰라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을 바에, 차라리 그 판에서 빠져나와 거실 구석자리에 마이너들 모아놓고 건빵내기 나이롱뽕 판이나 벌이는 게 나을 것이다.

자, 이제 당신이 실력을 발휘할 판이 시작됐다. ‘오고 가는 현찰 속에 밝아지는…’ 운운의 고스톱 언(諺)이 있잖던가. 차입경영이나 외상매입, 어음 따위가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현찰 싸움이 전개되는 것이다.
고스톱, 그거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그 말이야말로 능력이 변변찮은 자들이 나중에 패했을 때 ‘7할의 운’에 기대기 위해 만들어 놓은 핑계무덤이다.

“병장 계급장은 뭐 고스톱 쳐서 딴 줄 아나?” “내가 부장 자리에 고스톱 쳐서 올라온 줄 알아?” 이런 따위의 언사를 농하는 자들이 더러 있는데, 이는 전쟁 중에서도 최첨단의 기예가 투입되는 고도의 입체전이자 종합예술이기도 한 ‘성스러운 고스톱’을 심히 모욕하는 발언이다.

동지이자 적 표정 잘 살펴라

자, 첫 화투장을 내려치기 전에 마주앉아 있는 당신의 동지이자 적의 표정을 일별하라. 그 사이 무료함이나 서먹함은 오간 데 없고 그들의 눈동자가 오밤중의 야명주(夜明珠)처럼 전의에 불타고 있지 않은가? ‘살아있는 눈빛’이란 그런 것이다. 당신의 표정도 그럴 것이다.

아마 세상 내다버리겠다고 한강 다리로 가는 사람에게 밑천 몇 푼 쥐여주며 그를 고스톱 판에 잠시 불러 앉힐 수 있다면, 적어도 판돈이 바닥나는 순간까지는 그의 눈빛은 형형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자살 의지도 헤실바실 묽어지지 않을까? 그건 그렇고, 자, 그럼 시작하라, 고스톱!

‘놀이’에 ‘내기’가 더해지면 ‘노름’이 된다.

‘내기’의 역사는 유구하다. 나는 전라남도 완도군의 조그만 섬 마을에서 나고 자랐는데 그 일대에 전해져 오는 설화 풍의 얘기 중에 ‘칠기 섬 분쟁’이 유명하다. ‘칠기’라는 이름의 그 섬은 별 볼 것 없는 바위섬이라 인근 마을들에서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무인도가 김·미역·톳 따위의 주요 서식지로 알려지면서 마을들 사이에서 해산물 채취권을 둘러싼 점유권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이장들은 그 섬을 자기 마을 소유로 하기 위해 돈 보따리를 싸들고 육지의 관청을 뻔질나게 오르내렸으나 부사(府使)는 시간만 끌 뿐 좀처럼 판결을 내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마을 이장이 제안했다.

“이러다간 송사비용 때문에 네 개 마을이 모두 망하게 생겼소. 그러지 말고 마을을 대표하는 우리 이장끼리 돌림판으로 씨름을 해서 이긴 사람이 칠기 섬을 차지하도록 합시다.”

“그거 좋습니다.”

이렇게 해서 섬 하나가 걸린 한바탕 내기 씨름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도장리 이장 조씨가 승리해 칠기 섬을 그 마을로 가져갔다는데, 민속씨름·프로씨름을 통틀어 가장 판이 큰 내기 씨름이 바로 그 칠기 섬을 건 한 판 시합이었던 것이 틀림없으렷다!

그러나 고금을 통틀어 볼 때 내기놀이, 즉 ‘노름’은 역사 기록에서 늘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삼국사기 열전 편을 보면 백제의 21대 임금이었던 개로왕은 도미(都彌)라는 사람의 아내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도미와 내기를 벌여 이긴 다음, 그의 아내를 어찌 해보려다 낭패를 당한다는 장면이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그저 ‘내기를 해서 이겼다’고만 나와 있으나 아마 개로왕이 이겼다는 그 내기의 수단은 바둑이나 장기였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가 있다.

놀이+내기=노름 되는데…

아이고, 너무 오래 나가 있었다. 다시 처음에 벌여놓았던 고스톱 판으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고스톱이 한창 무르익었다. 그러나 화투판을 운영하는 것은 패를 쥔 세 사람의 선수다.

바둑이나 장기에서는 외인의 훈수가 적잖이 먹히기도 하고, 회사 경영에서는 전문 훈수꾼인 컨설턴트의 도움을 받기도 하나, 상황 상황이 변화무쌍한 고스톱 판에서는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다만, 이참에 고스톱 판에서 파생된 가담항설(街談巷說) 몇 가지는 그 허실을 분석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으렷다.

낙장불입(落張不入) : 고스톱 판이 제대로 된 경쟁의 장(場)이 되기 위해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규칙이다. “아이고, 흑싸리를 낸다는 것이 그만 똥을 내고 말았네. 다시 낼게.” 이건 시골 구멍가게에서 사이다 내기 화투를 칠 때도 좀처럼 용인될 수 없는 행위다.

장기나 바둑에서의 ‘일수불퇴’와 한 가지다. 계약서 작성하고 나서 없던 것으로 하자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나 내기에 걸린 급부(給付)가 소소하고, 당신의 승세가 확고하다면 까짓것 한두 번 봐줄 수도 있지 않은가.

배구 시합을 할 때 한 선수가 공을 두 번 터치하는 경우 여지없이 드리블 파울을 선언한다. 그러나 시골 동사무소 마당에서 빙 둘러서서 배구를 하거나 배드민턴을 칠 때는 ‘한 번 더!’라고 외쳐주지 않던가. 한 번 냈던 패를 거둬들이는 것을 합법으로 인정하는 놀이도 있다. 요즘 아이들의 가위바위보 놀이를 보라. 두 손을 동시에 내밀었다가 ‘하나 빼기!’를 하지 않던가.

비풍초똥팔삼 : ‘비풍초똥팔삼’이란 고스톱의 과학성을 심히 모욕하는 말이다. ‘마땅치 않으면 아무거나 내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말인데, 피 한 장이 그야말로 피(血)만큼 소중한 고스톱 판에서 ‘아무거나’라는 선택은 너무 무책임한 것이다.

더군다나 상황에 따라서는 비나 풍, 혹은 초의 열 끗짜리가 멍텅구리 더블로 연결될 수도 있으니 ‘비풍초똥팔삼’이라는 옛 시절 민화투 버전의 주문을 믿는다는 것은 요즘 같은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전략 부재를 선언하는 것이다. 범죄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차별 연쇄살인’이고 투자 중에서 가장 무모한 것이 ‘묻지마 투자’가 아닌가.

피박 : 아직도 피(皮·껍질)를 천시하는 인식이 있다면 당신은 석기시대 사람이다. 물론 내실의 중요성이야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지만 기술 수준이 엇비슷한 현대 사회에서 상품의 경쟁력은 외형을 어떻게 꾸미느냐에 달려 있다. 디자인이 품격을 좌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물론 신동엽 시인이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던 그 허위와 헛것으로서의 껍데기는 배척해야 마땅하지만, 고스톱의 피는 낱낱으로는 하잘 것 없어 보이나 따지고 보면 우리 집안의 맏며느리이자 묵묵히 선산을 지키는 굽은 나무다. 피를 볼품없는 싸구려라 홀대했다가 피박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신상품 개발에 돈을 쏟아 부었던 사장이 영업 장부를 들여다보면서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을 가끔 듣는다. “어이구, 그나마 천덕꾸러기 취급을 했던 그 구닥다리 저가 제품 아녔으면 직원들 월급도 못 줄 뻔했네!”

독박 : 고스톱 판의 교활한 천재와 우둔한 바보가 가끔 쓰는 덤터기가 바로 홀로(獨) 쓰는 바가지, 즉 ‘독박’이다. 자신의 승산이 희박해졌을 때 천재는 ‘놀이’에서는 지더라도 ‘내기’에서는 손해 보지 않거나 손해를 덜 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한다.

자신이 이길 수는 없되, 누군가를 이기고 지게 할 수 있는 수단이 있을 때는 ‘쇼당’이라도 걸어보겠지만, 그런 조건이 못 될 경우 반칙인 줄 알면서도 은근슬쩍 누군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패를 슬쩍 흘린다. 그건 불공정 담합 행위다. 요행히 그냥 넘어가면 좋겠으나 또 다른 상대가 알아채고 ‘너, 독박이야!’ 라고 치고 나오는 경우 뒷머리를 긁적이는 수밖에.

하지만 뭘 몰라서 독박을 쓰는 경우가 있다. ‘바보의 독박’이다. 심지어는 독박이 밝혀지고 나서도 왜 자신이 그런 벌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가 아무리 착한 사람이 할지라도 법규를 모르고 하는 상행위(商行爲)가 탈세가 되고 불공정 거래행위가 되고 저작권 위반이 된다면 그 역시 범죄다. 무지가 죄악이 될 수도 있음을 가르쳐 주는 곳이 또한 고스톱 판이다.

고(GO) 그리고 스톱(STOP) : 이것은 고스톱 판 경영의 키워드다. 고스톱에 참여한 어떤 사람이 ‘고’와 ‘스톱’을 외치는 상황 상황을 분석해 보면 그 사람의 성정(性情)·도량·지능·분석력 모두를 감지할 수 있다. 인재를 등용할 때 면접 수단으로 활용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이 바로 고스톱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이른바 ‘딱 점’(셋이 칠 경우 딱 3점)만 채워지면 가차없이 스톱을 외치는 협량(狹量)의 사람들이 있다. 그에게 그 화투놀이는 그저 ‘스톱 놀이’다. 그는 아무리 성공해야 판을 끝냈을 때 본전 이상 건지기 어렵다.

주로 그런 사람은 한 판 한 판이 끝날 때마다 매번 담요 속의 판돈을 동전까지 헤아려보고 수지타산을 셈한다. 어쩌다 목돈을 잃으면 낯빛부터 달아오른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인격적으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 소시민이 대개 그러하지 않은가.

‘나가리’없었다면 삭막할 뻔

그 반대 성향의 극점에 있는 사람이 바로 ‘열고파’다. 그 돈키호테 형 전사에게서는 ‘햄릿’의 사고와 고민은 찾아볼 수 없다. 무조건 ‘고’다. 단숨에 일확천금의 역전극을 펼칠 가능성이 있지만 순식간에 쪽박을 찰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그는 아마 사랑도 ‘최 진사 댁 셋째딸’에 나오는 칠복이처럼 육간대청에 버티고 앉아 진사에게 당장 딸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방식으로 쟁취하려 할 것이다. 개발연대(開發年代)에는 이런 ‘하면 된다’ 식의 일로매진형 인물이 성공을 구가하는 경우도 흔했으나 요즘 같은 과학 경영의 시대에는 글쎄?

나가리 : 고스톱 판을 사람살이에 비유할 때 ‘나가리’는 공수래 공수거, 혹은 무소유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고스톱 창안자의 ‘최고·최대 발명품’이다. 화투장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탐욕스러운 시선을 번득인 채 주고받던 날선 공방이 어느 순간 ‘원인무효’가 돼버리는 이 ‘지우개 찬스’가 없었다면 고스톱이 얼마나 여유 없이 삭막하기만 할 것인가.

대개 나가리가 승세를 거머쥔 사람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발생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가진 자에게는 겸손을, 그리고 의기소침해 있던 약자에게는 ‘두 배 판’으로 치러지는 다음 기회에 역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일어서기 : 고스톱에 참여했던 사람 열 명에게 물어보면 돈을 잃었다는 사람이 일곱쯤 되고 나머지 둘 혹은 셋은 ‘겨우 본전 건졌다’고 할 뿐 돈 땄다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쨌든 그 구조상 딴 사람보다는 잃은 사람이 더 많게 돼 있는 것이 고스톱인 바에 ‘유종의 미’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하다.

화투판에 외수(外數·속임수)가 판을 치고, 아침이면 집 문서나 황소가 노름빚으로 넘어가는 그런 사회악적인 의미의 ‘본격 노름’이야 마땅히 근절돼야겠으나, 점심값이나 대폿값 내기 고스톱 정도라면 그 긍정적인 기능이 만만치 않다.

설날 친척 친지들과 고스톱 한판을 벌였다면, 가장 부진한 사람이 손해를 어느 정도 만회했다고 보일 때 그만 판을 마칠 것을 제안하라. 당신이 돈을 땄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분이다. 내가 한잔 사지!”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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