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은 쉽게 변경될수 없는 「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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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최근 건설중인 수도권 5대 신도시중 「산본」이라는 지명이 발단이 되어 왜색이 풍기는 지명을 우리말 지명으로 바꾸자는 주장이 일고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행정리명·동명등도 일제때 마을과 마을 이름에서 한글자씩 취하여 만든 합성지명(예:종로구「청운동」은 「청품」과「백운」에서 비롯되었다)이 많으며 전국으로 무수히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산본」이란 지명은 일본 성씨의 하나인 「야마모토」(산본)와는 관계가 없다.
본래 「산본」이라는 이름은 평범한 우리말의「산밑」을 한자로 의역한 것이므로 이런 종류의 이름은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중국·일본·대만·우리나라등지에 얼마든지 분포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왜색지명을 바로 잡아 나간다면 서울 강동구의 「강동」은 일본의 고토(도쿄의 구)와 같고, 강원도의 대관령 동족을 뜻하는「관동」은 일본의 간토(도쿄와 그 인근지역)와, 경기도성남시의 「성남」은 조난(규슈)과, 충남 대천시의 「대천」은 오카와(규슈)와, 전북완주군고산면 「고산」은 다카야마(기후현)와 같으므로 모두 고쳐야 될 것이며, 이런 지명의 예는 많은데, 이들을 모두 왜색지명으로만 보고 고치기 시작한다면 큰 혼란이 뒤따를 것이다.
한자문학권에 속하다 보니 우리 지명에 중국의 지명을 그대로 옮겨와 쓰는 곳도 매우 많다.
우리의 「한강」과 서울의 옛 이름인 「한양」이 모두 중국 양자강 지류인 한강이나 그 강변의 한양과 같으며「영남」은 중국에서 남령산맥이 남의 땅인 광동·광서·운남일대를 일컫는 말이요,「호남」역시 중국의 동정호 이남지방으로 지금의 호남성일대를 일컫는 말이다.
지명은 땅에 새겨진 언어다. 그러므로 지명은 변화되어 가는 것이지 변경하는 것은 아니다.
지역은 그 자체가 한 시대를 투영하는 것이므로 역사와 문화의 화석이라 할 수 있다.
몇년전 한강을 「한강」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그 주장에 수긍하면서도 선뜻 바꾸지 못했던 것은 한강이 대한민국만의 한강이 아닌 세계의 한강으로서 한자문화권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한강을 「한강」으로 바꿀 경우 북한강·남한강·북한산·남한산성, 심지어는 제주도의 한라산이나 옛 한양까지 모두 바꾸어야 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또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는 일본내 여러곳에 분포되어 있는 우리 지명들, 예컨대 아스카의 고려산이나, 이즈미의 백제촌, 나라(내량),고마(고려), 고려천, 가야(가야)등의 수많은 지명에 대하여, 일본이 이를 한국에서 전래된 지명이라 하여 바꾸기 시작한다면 한·일사이의 역사와 문화교류등을 파악하는데도 많은 문제가 생긴다는 점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물론 잘못된 지명은 바로잡아 나가야 하고 더구나 일제때 개명된 지명을 하나하나 고쳐나가야 한다는 데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지명 변천과정을 반드시 기록으로 남기도록 하고, 잘못 붙여진 지명은 행정구역을 개폐하거나 조정할 때 바로 잡아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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