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시인 이근배|사명대사 불문 첫발 디딘 직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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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디부터 찾아가야 할 것인가. 저 불교가 빛을 잃던 조선조에서 국난을 서슴없이 이겨내 새 빛을 밝혔던 큰스님 사명당 유정(사명당 유정)을 만나보려면 합천 가야산 홍제암에는 그의 사리를 모신 부도(부도)가 있고 영정을 모신 영자전이 있으며 당대의 대문장 허균이 비문을 쓴「자통홍제존자 사명송운대사 석장비(자통홍제존자 사명송운대사 석장비)」가 있다.
밀양 천황산 표충사엘 가면 우화누에 사명대사가 겪은 임진왜란 10년을 책으로 쓴『분충
서난록(분충서난녹) 』과『사명당대사집』의 목판과 전쟁 뒤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와 담판을 하고 돌아올 때 그곳 스님으로부터 받은 연화발우(연화발우)등 유물들이 있다.
뿐인가, 해남 두륜산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수충사)에는 스승인 서산대사와 함께 제향을 받들고 있고 금강산 유점사(유점사)는 임란 때 승병을 모집한 곳이다. 묘향산과 금강산은 후일을 기약하기로 한다 치고 아무래도 사명당을 먼저 뵙기로는 황악산 직지사부터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추풍령을 넘어 김천에 다다르면 시내에서 서쪽으로 30리쯤에 황악산 직지사(경상북도 금릉군 대항면 운수리)가 나온다. 신라 눌지왕2년(418년) 아도화상(아도화상)이 지었다고 하는데「직지인심 견성성불(직지인심 견성성불)」의 불경에서 이름을 빌렸다고도 하고 아도화상이 선산의 도리사를 세우고 저곳에도 절을 세울 터가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얻은 것이라고도 한다.

<아도화상이 창건>
사명당이 이 직지사에서 머리를 깎고 불문에 들어간 것은 16세때의 일이었다. 그의 속명은 임응규고 본관은 풍천이다. 중종39년(1544년) 밀양에서 아버지 수성과 어머니 달성 서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난다. 증조부 효곤이 문과에 급제, 장악원정의 벼슬을 했던 만큼 학문이 깊던 집안이라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역사를 배울만큼 공부에 일찍 눈을 떴다.
하루는 동네 아이들과 밤을 줍고 있었는데 어부가 큰 자라를 잡아가는 것을 보고 주운 밤과 바꾸어 자라를 연못에 놓아줌으로써 어른들로부터 장래를 알아보게 하였다. 13세때는 황여헌(황여헌)에게『맹자』를 읽었는데 어느날 저녁 그는 책을 덮고『속학은 천하고 낡은 것이며 세상의 인연에 얽매이고 번거롭다. 어찌 불법을 배우는 것만 하겠는가』라고 깨닫고는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스님에게 절하고 머리를 깎게된다.

<당대문사들 교류>
맨 처음『전등록』을 읽었는데다 읽기도 전에 뜻을 깨닫는 것을 보고 노숙들이 오히려 그에게 묻는 바가 되었다. l8세때 사명당은 선료에 응시, 당당하게 급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다. 불교를 숭상하는 문정왕후에 의해 스님들에게도 과거제를 만들어 4회를 맞는 때였는데 이 선료에 급제한 것을 계기로 당대 최고의 문사들과 교우를 맺게 된다.
박순·이산해·고경명·허균·임제·이달등 대문장가들과 만나 주고받은 시와 편지, 학문의 이론들은 문단에 널리 퍼져 사명당의 이름이 자자했다. 허균의 형인 허부과는 한퇴지의 긴 글을 한번 읽고 외우는 내기를 했는데 그것을 본 기대승의『재주만 믿고 자만하면 공부가 나가지 않을 것이다』는 경고를 듣고 정신을 차리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서울의 이름난 문인들과 더불어 시를 짓고 논하기에 그는 젊은 날을 보내게 된다. 그가 다니 황악산 직지사에 돌아오기는 20대 후반이 아닌가싶다. 왜냐하면 그가 쓴 보우스님의『허응당집』의 발문에「직지사주지 중덕유정교(직지사주지 중덕유정교)라고 적혀 있는데 그해가 1573년으로 사명의 나이 30세가 되기 때문이다.
사명은 처음 입문한 직지사에 주지로 돌아오게 된 것이 더 없이 기뻤으리라.
열다섯에 집을 떠나 서른에야 돌아왔구나 긴 개울은 옛날 같이 서쪽에서 흘러오고 감다리 동목 언덕에 천가닥 늘인 수양버들반도 넘게 내 떠난 뒤 심은 것이구나
『귀향』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시는 직지사 주지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옛집을 찾아가 금의환향하는 심회를 읊은 것 같다. 그는 20대의 서울에서와 이곳 직지사에 와서도 많은 시문을 썼던 것으로 기록에 나와있다.
허균이 쓴 비문에『사는 젊어서부터 지은 많은 글을 나의 형 허부이 가지고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병화에 불타 없어지고 문인들이 외우는 것을 모아 7권을 전하니 아는 이는 그 맑고 넉넉함에 상찬을 아끼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서산대사 제자로>
그는 32세에 나라안 큰스님들의 추대로 당시 불교의 우두머리 절인 봉은사의 선종주지로 추대된다. 그러나 그는 더 배움을 구하고자 묘향산의 서산대사를 찾아간다. 서산대사는 자신의 깨달음과 성종을 이어받을 사람으로 사명을 받아들여 가르침을 준다. 사명은 지금까지 쓴 글들이 문장의 유희요, 교묘하게 꾸민 말들이라고 크게 반성하고 고행으로 정진하게 된다. 서산대사에게서 3년 동안 바른 법을 얻은 후에야 그는 하직하고 나와 금강산 보덕사에 들어가 세 여름을 보낸다.
팔공산·청량산·태백산을 떠돌다가 옥천산 상동암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소나기에 꽃이 모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는 무상을 깨닫는다.
어제 꽃이 피더니 오늘 빈 가지로구나 세상 변하고 사라짐도 또한 이와 같은 것
하루살이처럼 떠도는 삶 시간을 헛되이 보낸 일이 가엾고 서글프구나
그대들도 영혼이 있거늘 어찌 큰 일을 하지 않으며 부처가 내 마음속에 있거늘 어찌 밖에서만 찾으러 하느냐
이 시가 사명의 법어이자 대표적 선시로 꼽히고 있는 것은 그가 서산으로부터 받은 불법의 자기 완성 시기에 쓰인 때문이기도 하다. 사명의 구도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면벽의 세월로 이어진다.
1588년 오대산 영감난야(영감난야)에서 참선하던 그에게 청천벽력으로 역적죄의 오라가 떨어진다. 정여립이 스승 서산을 무고함에 따라 연루된 것이다. 강릉부에 투옥되었으나 그곳 유생들의 진정과 서산에 대한 선조의 오해가 풀려 곧나오게 된다.
그러나 곧이어 일어난 임진왜란은 사명당으로 하여금 분충구국(분충구국)의 위대한 실천사상을 보여주게 한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결제(결제-수행)를 하고 있던 사명당은 침입한 왜적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는 왜장을 타일러 금강산에서의 살육과 사찰의 방화를 제지했으며 영동 아홉 고을을 병화에서 구하는 슬기를 보였다.

<왜장간담 서늘케>
선조의 부름을 받은 서산대사 휴정이 일어섰을 때 금강산에서 7백 승병을 이끌고 순안으로가 선교도총섭(선교도총섭)이 된 서산대사의 휘하에 들어가 평양성을 탈환하는 큰 전과를 올린다. 이 공로로 노사 서산의 뒤를 이어 도총섭이 되는 도원수 권율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 경상도 의령에 주둔하고 왜적을 퇴치하였다.
부산에 진치고 있는 적장 가토기요마사(가슬청정)를 세번이나 찾아가 침략의 부당함을 꾸짖고 물러가기를 종용한 것도 사명당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가슬청정이『조선에 보배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 『네 머리를 베는 것이 보배』라고 해서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정유재란때에는 명나라에서 원군으로 온 마귀·유정(유정)등 두 제독과 더불어 도산·예교(예교)등지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전쟁중에도「토적보민사소(토적보민사소)」「을미상소」등을 올려 적의 퇴치에 백성들이 모두 나설 갓과 민심수습 및 국방정책에 대해 건의한다.
이렇듯 임진왜란 때 분충구국의 대업을 수행한 사명당에게 선조는 1602년 동지중추부사의 높은 벼슬을 내린다. 그리고 두해 뒤인 1604년 묘향산 원적암에서 스승 휴정이 입적했다는 부음을 받았으나 선조로부터 일본에 수신사로 갈 것을 명받게 되어 다비식에 참가하지 못하게 된다.

<가야산서 입적>
일본에 건너간 사명당 유정은 8개월동안 머무르면서 덕천가강과 담판을 해 포로로 잡혀간 동포 3천여명과 함께 돌아오니 1605년 4월이었다. 귀국후 곧바로 10월 묘향산에가 스승 서산대사 영전에 향을 피운다.
승병을 일으켜 임진왜한에 참전, 전술·담판에 탁월한 성과를 거둔 사명당은 그후 진중기록인『분충서난록(분충서난록)』을 손수 쓴다. 1601년 사명당 유정은 67세 무루(무루)의 시인으로, 국난극복의 명장으로 이 나라의 한 역사를 가득 채우고 가야산 홍제암에서 열반에 든다.
저서로는『분충서난록』과『사명집』7권이 있는데 거기 수록된 시만해도 2백57수나 된다.
아아, 그가 낳은 저 숱한 법어의 시편들을 다 들출 수가 없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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