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 고민 많이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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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 대한 선고를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 김동오 부장판사는 20여 분간 판결 이유를 자세하게 밝혔다.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정 회장은 간간이 마른 침을 삼키며 재판부의 설명을 들었다. 이어 재판장의 요구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선 정 회장은 "피고인 정몽구를 징역 3년에 처한다"는 실형 선고에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집행유예를 기대하며 방청석에 나와 있던 현대차 관계자들도 당혹스러운 모습이었다. 재판이 끝난 뒤 정 회장은 몰려든 취재진의 질문에 입을 꽉 다문 채 법정을 빠져나갔다. 방청석에 있던 아들 정의선 기아차 사장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 회장을 뒤따랐다. 서울중앙지법에서 규모가 가장 큰 재판정(200석)에는 현대차 관계자와 취재진 등 250여 명이 몰려 일부는 재판 시작 1시간 전부터 줄을 서야 했다.

◆경제적 파장 놓고 고심=정 회장에 대한 법적 판단과 함께 경제적 파장을 고려해야 하는 게 재판부로서는 가장 큰 고민이었다. 김 부장판사는 선고 이유를 설명하면서 "재판부가 양형을 놓고 많이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는 검찰이 정 회장에게 적용한 네 가지 혐의 사실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부외자금(비자금)을 대부분 그룹 경영에 사용한 점 ▶현대강관의 회생과 정상화가 결국 현대차의 이익으로 이어진 점 등을 강조했다. 정 회장에게 유리한 정상 참작 내용을 알리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이다. 김 부장판사는 재판이 끝난 뒤 취재진의 면담을 거절했다. 법원의 한 관계자는 "이번 판결을 놓고 여러 해석이 나올 우려가 있어 판결 외의 말을 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절충안 택한 법원 판결=김 부장판사는 "과거의 관행이라 해도 법률상 명백한 범법행위"라며 실형 선고 이유를 밝혔다.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세간의 불신을 피해 가기 위해서는 유죄를 인정한 이상 실형 선고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김 부장판사는 "잘못된 관행을 청산하고 투명한 기업경영을 통해 우리 경제가 선진경제로 한 단계 도약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비춰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현대차가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회사의 상황을 고려할 때 재판부가 정 회장을 법정구속하는 것에 대해 큰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재판부는 실형을 선고해 명분을 지키면서도 정 회장이 회사 경영을 계속하도록 하는 실리를 챙기는 절충안을 선택했다.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라는 설명과 함께 정 회장의 보석 상태를 유지해 법정구속을 하지 않은 것이다. 보석 상태에서는 법원의 허가를 받은 경우 해외출국도 가능하다.

서울중앙지법 이효제 형사공보판사는 "사회적으로 알려진 인물이어서 도주 우려가 없는 점도 감안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재판부의 이번 판결은 '재벌 봐주기'와 '경제 죽이기'라는 극단적 여론 사이에서 나온 법원의 고육지책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민동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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