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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좋은 집, 팔기 좋은 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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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나도 비록 종부세 부과 대상에는 못 끼지만 수도권에 서른 두 평 아파트를 갖고 있으니 부동산에 관한 한 그리 못난(?) 축은 아니다. 이십 수년 전, 집들이 온 친구 셋과 고스톱을 치려면 한 명은 방 문턱에 걸터앉아야 했던 사글세 '지상의 방 한 칸'에서 시작해 이만큼 컸다며 은근히 자부심까지 느끼던 터였다. 그러나 TV 출연자의 정곡을 찌른 한마디는 "나도 바보였나 보다"라는 자괴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앞으로도 다시는 살아 볼 기회가 없어 보이는 서울 강남과 목동 아파트가 갑자기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물론 그의 말을 일반인이 몰라서 실천하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돈이 모자라서, 정보가 부족해서, 운이 없어서, 그도 저도 아니면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다른 것을 앞세웠기 때문에 따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모두가 부동산 부자를 본받으려 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한다(아직 정신 못 차렸다). 게다가 나는 우선순위를 팔기 좋은 집보다 살기 좋은 집에 두는 '무모한' 몇 사람을 알고 있다.

경기도 파주의 예술인마을 '헤이리'에 둥지를 튼 주민들은 거개가 살기 좋은 집을 앞세운 쪽이다. 방송인 황인용씨는 자택 겸 음악감상실 '카메라타'를 지으면서 건물 둘레에 좋아하는 자작나무 수십 그루를 심었다. "자작나무의 희고 깨끗한 이미지가 시멘트 색깔과 딱 어울린다"고 그는 자랑한다. "팔기 좋은 집은 아니다"라는 필자의 지청구에 황씨는 "나는 강남 같은 곳에 집 사놓으면 돈이 된다는 개념이 애초부터 없었다. 그저 인생을 어떻게 폼 나게 살아 볼까 하는 궁리만 했다"며 웃었다.

황씨 집 인근의 금산 갤러리. 주인은 서양화가 백순실씨다. 집 지을 터에 헤이리에서 제일 오래된, 80년 된 굴참나무가 있었다. 백씨는 나무를 살리기 위해 건물 벽에 크고 작은 구멍 12개를 냈다. 배수로와 나무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구멍까지 내느라 건축비가 1억원 정도 더 들었다. 나뭇가지가 구멍을 통해 건물 밖으로 뻗쳐나온 금산 갤러리는 지금 헤이리의 명물로 꼽힌다. 백씨는 "과수원집 딸로 태어났기에 원래 나무에 대한 애착이 많았다"며 "얼마 전 '우리 죽으면 화장되어 이 나무 밑에 묻히자'고 남편과 약속했다"고 고백했다.

사회학자 김영작(국민대) 교수도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에서 구기동으로 이사 온 전형적으로 무모한 사람이다. 그의 'ㄷ'자 한옥 마당에는 며느리 맞은 기념으로 심은 보리수, 딸이 박사학위를 받은 기념으로 심은 매화나무가 야생화들과 함께 자라고 있다. "우리 집은 값을 매길 수도, 매길 생각도 없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이런 용기를 내기는 쉽지 않다. 전국의 살기 좋은 집을 구경 다닌 이야기를 엮어 '김서령의 가(家)'라는 베스트셀러를 낸 생활칼럼니스트 김서령씨도 "살기 좋은 집을 샀다가 10년 뒤 팔기 좋은 집을 산 사람과 '계층이 달라지는' 경험을 하고 후회하는 사람도 많더라"고 했다. 그러나 김씨 본인은 수백 년 된 경북 안동 고가(古家)의 양지 바른 산실(産室)에서 태어났고, 자신의 아들도 병원에서 낳은 직후 이 산실에서 한 달간 품어 키웠다. "조상이 태어나고 내가 세상에 나온 바로 그 방에서 자식을 품는 뿌듯함을 요즘 사람들은 모를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집값 광풍에 억장 무너진 이들에게 돌멩이 맞을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무래도 팔기 좋은 집보다는 살기 좋은 집이 낫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이들이 살기 좋은 집을 택하고 싶다. 살기도 좋고 팔기도 좋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세상이 어디 그리 만만한가.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