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집가의 품에서 뭉친 민중 미술의 힘과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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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조재진 사장 부부

1980년대 서울 인사동 화랑가에는 수요일마다 전시장을 순례하는 미술 애호가 부부가 있었다.중소기업인 조재진(61)씨와 부인 박경임(57)씨다. 부부는 미술 그 자체를 좋아해 웬만한 전시회는 놓치지 않고 감상했다. 수첩에는 그 주에 봐야할 전시회 목록이 깨알만한 글씨로 적혀 있었고 노랑 포스트잇이 몇 장씩 붙어 있었다. 화랑가에서는 '조 사장 취향'이라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였다.

이들의 미술 사랑은 동서고금과 장르를 망라했다. 고미술의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근대미술의 수화 김환기, 고암 이응로,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조선시대의 서예.민화.장신구.민예품…. 이들의 폭넓은 수집품은 나중에 과천집 당호를 따서 '청관재 컬렉션'으로 불리게 됐다.

조씨는 몇해 전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에 '빈수레'라는 유화를 기증하고 추사동호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지난해에는 제주에 추사의 간찰(편지)을 기증하기도 했다.

그의 컬렉션 가운데 미술계에서 이름 높은 것 중 하나가 민중미술 분야다. 1985~91년 민중미술이 한창 그려지고 있던 바로 그 당시에 직접 돈을 주고 수집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민중미술은 형식이 졸렬하고 구성이 도식적이며 메시지가 직선적이라며 폄하를 받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평론가로서 작품을 소개하다 조씨 부부의 친구가 된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청관재 부부가 민중미술 작품을 수집하게 된 것은 순전히 예술로서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 이념까지 지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작품에 어려있는 예술성을 일찍이 알아보고 그들 작업의 진정성을 인정해준 고마운 지지자였다"고 설명했다.

그로부터 20년쯤 지난 오늘날, 이들 부부의 방대한 민중미술 수집품을 일반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2일부터 19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에서 열리는 '민중의 힘과 꿈-청관재 민중미술 컬렉션전'이다(02-720-1020). 민중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23명의 작품 150여 점이 나왔다.

신학철.오윤.홍성담.임옥상.황재형.홍선웅.이종구.이철수.여운.김인순.민정기.박불똥.박재동.송창.유연복 등의 작품이다. 그중에는 신학철의 '한국 근대사', 임옥상의 '6.25 전후의 김씨'처럼 미술관이 아니면 구입이 불가능할 것 같은 대작도 포함돼 있다.

표현기법은 다양하다. 민화 같은 색면.사실 묘사.변형.왜곡.은유.상징.풍자.해학 등이 풍부하고 다양하게 구사돼 있다. 어두운 시대를 투쟁으로 이겨내려는 의도를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구현하기 위한 것일 터이다.

군사정권과 싸워야 했던 운동가들의 마음, 이들이 전하려 했던 민중의 마음, 시대의 삼엄한 상황 속에서 강렬하게 이야기해야 했던 희망이 작품 속에는 녹아있다.

시대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지금도 이들 작품에는 상상력과 울림이 있다. 예술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지만, 컬렉터의 안목을 대변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임옥상의 '무'(사진)를 보라. 흙에서 막 파낸 거대한 무가 극사실적으로 묘사돼있다. 배경에는 메마른 밭과 황량한 들판이 희망없이 펼쳐져 있다. 피폐한 농촌 현실과 그 속에서도 먹거리를 키워내는 생명의 힘을 함께 표현하려 한 것이리라. 이 작품은 앞으로도 인간과 생명의 존엄함과 힘을 대변하는 예술품으로 살아 남아있을 것이다. 농촌이 계속 피폐하든, 잘 사는 고향으로 변하든 말이다.

신학철의 '타는 목마름으로'(사진)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과 살육의 검붉은 공간을 벗어나 시원하게 빛나는 하얀 달로 향하고 싶은 염원이 강렬하고도 간절하게 표현돼 있다. 우리가 아직 사람임을, 얼굴도 몸통도 없어질 정도로 뭉개진 삶이지만 아직도 살아있으며 자유와 탈출을 소망하고 있음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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