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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교수의열린유아교육] 삐뚤빼뚤 긁적거린 유아 그림 '자기 선호' 찾는 소중한 체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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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막내딸은 23개월에 빨간 크레파스를 들고 하얀색 라디오 위와 그 근처의 장판에까지 가득 긁적거리기를 해 놓았었다. 아이가 낮잠 자는 동안 이모가 열심히 그 빨간색을 다 지워 놓았는데 잠을 깨자마자 아이는 라디오가 하얗게 된 것을 발견하고 "이모 미워, 이모 미워"하며 통곡했다.

생후 20개월 전후의 아이들이 긁적거리기를 시작하면 엄마.아빠들은 "어린 미술가가 탄생하는구나"하며 기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영유아 3만 명의 그림을 모아 분석한 켈로그는 긁적거리기가 나타나는 시기를 아주 중요하게 보았다. 마음대로 손과 팔을 움직여 긁적거리는 동안 아이들은 나름대로 자기가 선호하는 모양을 발견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긁적거리기를 하는 도중 삐뚤빼뚤한 동그라미를 그리기도 하고, 어설픈 세모.네모를 그리기도 한다. 켈로그는 이런 어설픈 모양을 약 20종으로 분류했는데 커서 사물을 그릴 때 굴뚝모양으로 쓰기도 하고 창문으로 쓰기도 하며 얼굴.머리카락.눈을 그리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긁적거리기를 하는 기간은 아이마다 다르다. 어떤 아이는 1년 이상 긁적거리기를 하는 반면 어떤 아이는 긁적거리는 시기가 빨리 지나가기도 한다. 20개월 전후의 아이들에게 그림 그리기를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쳐서도 안 되지만 20개월이 지난 다음부터 집안에 굵은 크레파스나 굵은 색연필을 마련해 주고 종이도 마련해 주면 좋다.

그러나 이 시기의 아이들은 마련해 준 종이에 긁적거리기를 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새로 도배해 놓은 벽에도 그리고, 문에도 그리며, 식탁에도 그린다. "야, 너 어디다 낙서질이야" 또는 "거기다 그러면 안 돼"하며 소리쳐 아이의 자발성이 움츠러들지 않게 해야 한다. 만 3세 미만에는 하지 말아야 할 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환경을 변화시켜 아이가 자연스럽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도록 해야 한다.

큰 종이와 크레파스를 슬그머니 주어 아이가 벽이나 가구에 긁적거리기를 자연히 하지 않게 하는 것이 그 예다.

이원영 중앙대 유아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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