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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앞에 조폭의 의리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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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조폭마누라><두사부일체><가문의 영광><예의 없는 것들><거룩한 계보><비열한 거리>…. 언제부터인가 조직폭력배, 이른바 '조폭'은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자리 잡았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이들은 비록 범죄를 저지르기는 하지만 '완벽한 위계질서와 두목.조직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치는 의리의 화신'으로 형상화된다. 뿐만 아니라 조폭 드라마의 시초가 된 드라마 <모래시계>는 물론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 <연인> 등에서 조폭은 아픔을 간직한 매력적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월간중앙>이 단독 입수한 '조직폭력배의 소득원에 관한 연구'를 통해 드러난 조폭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이 보고서는 지난해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전국 6개 교도소에 수감된 조직폭력배 109명(전체 수감자 655명의 16.6%)을 대상으로 한 심층 면접조사 결과다. 이 같이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면접조사가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최종 결과는 1월 말 발표할 예정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오늘날 조폭은 매우 경제적이고 교활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위.아래를 고려하지 않는다. 의리의 화신은커녕 돈 앞에서는 의리도 따지지 않는다. 조직의 탈퇴도 다반사다. 보고서는 또 요즘 폭력조직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라는 점에서 여러 면에서 일반 기업과 공통점을 지닌다고 지적한다.

물론 기업은 합법적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는 데 반해 폭력조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경제적 이익을 취득해 조직의 규모와 사업 범위를 확장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속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들은 과거 유흥업 관리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 사업에서 영역을 넓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 전 영역에 걸쳐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익을 추구하는 그들의 새로운 움직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요즘 조폭에 대한 7가지 오해>

1. 의리에 죽고 산다? 돈 오가는 곳이면 형.아우 개념도 흐려

2. 유흥업소에 기생? 부동산 개발사업과 M&A에까지 손 뻗쳐

3. 룸살롱 선호? 수사 위험 덜한 갈빗집 등 식당업 더 좋아해

4. 돈방석에 앉는다? 수입은 샐러리맨 평균 약간 웃도는 수준

5. 마약거래? '걸리면 다 죽는다' 위기감에 마약류는 절대 금기

6. 이권싸움? 사업영역 다양화하면서 한 분야 정면충돌 거의 없어

7. 배신하면 보복? '갈 테면 가라' 등 돌린 조직원 보복은 옛말

1. 부동산 투자에서 M&A까지 넘나든다

- IMF 외환위기 때 사채업으로 자본 축적해 새 영역 진출

우선 수감된 조직폭력배들은 사회에서 어떤 사업으로 조직을 운용하며 먹고살았을까? 설문에서 제시한 ▷유흥업소 직접 운영 ▷유흥업소 영업 보호 ▷사채업 및 채권추심업 ▷부동산 개발 및 시행사업 등 13개 사업분야 중 응답자의 압도적 다수가 '유흥업소 직접 운영'(67.6%) ' 유흥업소 영업 보호'(61.1%)에 종사했다고 답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유흥업소를 직접 운영한다는 응답이 간접으로 이들 사업을 보호한다는 응답보다 높게 나왔다는 점이다. 이는 과거 폭력조직의 경우 자본 없이 이들 업소에 기생하며 조직을 운영했던 데 반해 지금은 폭력조직이 일정 수준의 자본을 축적하고 있다는 말이다.

검찰은 폭력조직의 자본 축적을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나타난 새로운 현상으로 보고 있다. 실물경제에서는 현금유동성이 부족했던 IMF 외환위기 기간에 폭력조직은 오히려 고리의 대부사업에 뛰어들어 자금을 증식했다는 것이다. 이때 축적한 자본을 바탕으로 조폭은 자연스럽게 사업 다각화에 나섰다. 조사에서 3위를 차지한 '건축 및 부동산 개발.시행사업'을 비롯해 5위인 '입찰.경매', 7위 '연예사업', 8위 '직업소개.용역 및 경비업' 등이 이들이 새롭게 진출한 대표적 영역이다.

그런가 하면 조폭의 전통적 사업영역도 여전히 강세다. '사채업 및 채권추심업'(4위), '도박장 개설 및 사설 경마'(5위), '노점상 등 영세 영업 보호'(9위) 등이 바로 그것.

이들 중 1개 사업만 운영하는 조직은 30% 미만이며, 70% 이상이 2개 이상의 사업을 운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즉, 유흥업소 관리 혹은 사채업, 도박장 개설 등 전통적 사업을 중심으로 하면서 자금 동원력에 따라 다양한 업종의 사업을 부수적으로 운영하는 식이다.

조폭들이 전통적으로 유흥업을 기본 사업으로 삼는 것은 이 분야가 상대적으로 경기의 영향을 덜 받는 데다 특화된 기술이 필요 없는 직종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유흥업은 '폼이 나고, 화려해야 하며, 야행성에 맞춰져야 한다'는 조폭의 생리와도 잘 맞는다.

그러나 조사에 따르면 조폭들은 의외로 나이트클럽이나 룸살롱 등 유흥업소보다 식당업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술집을 운영하면 검찰이 조직의 자금원으로 간주해 수사망에 오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식당업의 형태로는 갈빗집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이한 것은 과거 폭력조직의 주력사업과 거리가 멀었던 건축 및 부동산 개발.시행사업이 2위로 뛰어올랐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이를 우리나라 경제구조에서 건축과 부동산 시장이 기형적 모습으로 팽창한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2. 조직원 사이에도 공짜는 없다

-가계 그냥 물려주는 사례 없어… 돈 없는 고참 밀리기도

흔히 조직폭력배를 의리 혹은 정으로 뭉친 집단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조폭 스스로는 그렇지 않다고 진술했다. 돈 거래, 사업 등에서는 조직원 간에도 엄격하게 계산한다는 것이다. 손 벌리는 것을 경계해 조직원 사이에 소득을 숨기려는 경향도 있다. 이들에게 사업은 사업일 뿐이다. 형님이 동생이라고 해서 사업이나 업소를 그냥 물려주는 경우는 없으며, 가계를 대물림할 때는 업소에 걸린 보증금을 갚아야 한다. 요즘은 업소가 대형화됐기 때문에 혼자 할 수 없어 보통 조직원끼리 공동투자한다.

조사에 응한 한 조직폭력배는 "처음에는 각자 나이트클럽 같은 데서 영업사무를 봐주는 일을 한다. 나이 서른이 넘으면 자기 업소 하나씩을 갖게 된다. 이는 조직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돈으로 능력껏 마련하는 것이다. 조직이 도와주는 것은 얼마 없다. 영업장을 소개해 주는 정도다. 장사는 자기 능력껏 하는 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고 한다.

조직폭력배들 사이에 정이 없어지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경향은 최근의 뚜렷한 현상이다. 그 결과 과거 잘 나갔다고 하더라도 현재 돈이 없으면 조직에서 대우받지 못하는 일도 벌어진다. 조사에 응한 또 다른 고참 조직폭력배는 "동생들이 무엇 하나 잘못했다고 함부로 때리지는 못한다. 때릴 경우 검찰에 '불어 버리기도' 한다. 요즘에는 형들의 말이 잘 안 먹히고, 용돈 주고 시키면 따라오기는 하지만 돈이 없으면 형님 대우도 못 받는 실정"이라고 진술했다.

그렇다면 조폭의 수입은 얼마나 될까? 조직 구성원의 월평균 수입은 100만 ̄300만 원이 29.2%로 가장 많았으며, 300만 ̄500만 원이 28.1%로 뒤를 이었다. 500만 ̄1,000만 원이라고 응답한 조폭도 22.5%나 됐다. 일반적으로 샐러리맨보다는 많이 버는 셈이다.

그러나 월평균 수입 중 조직 일을 하고 받는 대가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 총 수입 중 조직을 위해 일한 대가로 받은 보수가 얼마나 되느냐는 물음에 100만 ̄200만 원이라는 응답이 27.5%로 가장 많았고, 50만 원 미만이라는 응답과 200만 ̄300만 원, 500만 ̄1,000만 원이라는 응답이 15.9%로 뒤를 이었다. 대략 조직 구성원의 수입 중 절반 정도는 스스로 충당하고, 나머지 절반은 조직의 일을 도와줌으로써 받는다는 말이다.

조직폭력배의 대표적 소득원은 유흥업소 관리 명목으로 받는 돈이다. 대략 한 업소에서 150만 원 내외를 받는다. 관리하는 업소가 늘면 받는 돈도 그만큼 늘어나지만 대체로 행동대원급은 1개 업소만 관리하고 다른 일을 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행동대장급 이상은 몇 개 업소를 중복으로 맡는다. 조직원들이 조직에서 생활하다 독립해 사업을 운영할 경우 조직에 돈을 상납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3. '직무만족도' 경찰보다 높다

-'보통' 응답비율 67%로 경찰보다 11%포인트 높아

좀 생뚱맞은 질문이지만 조폭들은 자신의 직업에 얼마나 만족할까? 이번 조사의 '조직원으로서 느끼는 직무만족도' 문항에서 67%가 '보통'이라고 답했으며, '불만족'이 18.6%로 뒤를 이었다. 그러나 '만족'이라는 응답도 11.3%나 됐다. '매우 불만족'과 '매우 만족'은 각각 2.1%와 1.0%였다. 조직생활에 만족하는 경우('매우 만족'과 '만족'을 합친 12.3%)보다 불만족('매우 불만족'과 '불만족'을 합친 20.6%)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이는 경찰이 2004년 경찰공무원을 상대로 실시한 직무만족도 결과보다 높은 수치다. 2004년 경찰의 직무만족도 조사에서 '보통'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55.9%로 조폭보다 11%포인트 낮았으며,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매우 불만 3.3%와 불만 31.4%)가 34.7%로 조폭보다 무려 14%포인트나 높았다. 또한, 만족한다는 경우(매우 만족 0.1%, 만족 9.4%)도 조폭보다 2.8%포인트 낮았다. 폭력조직 구성원에 대한 법 집행 업무를 담당하는 경찰조직 구성원의 직무만족도가 조직폭력배의 직무만족보다도 낮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오효림 월간중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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