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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마을] 슬픔도 잊는 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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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엄마는 몇 년 전 교통사고로 수개월 입원한 뒤 기억력이 점점 떨어지더니 지금은 치매에 파킨슨병까지 겹쳐 몹시 쇠약해지셨다.

어느 날 주무시고 일어난 뒤 갑자기 "니가 누고?" 할까봐 언제나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목도리에 대해서도 "누가 사준거냐"고 물으면 "몰라, 니가 사가지고 왔나?" 하시며 더더욱 꼭 여미신다. 26년 전 가슴 아픈 기억마저 이젠 다 잊으신 걸까.

열여섯 꽃봉오리 같은 나이에 세상 떠난 딸. 어려운 시골 살림에 위로는 두 언니와 오빠, 아래로는 동생들에게 늘 치여 지냈던 아이. 살아생전 변변한 옷 한 벌 못해줬다며 내의부터 겉옷, 하얀 운동화 한 켤레까지 새 걸로 사, 여름이면 그 아이가 공기놀이 하며 놀던 동네어귀에서 불태우며 통곡하시던 당신. 그 아이가 학교 다니며 틈틈이 뜨개질한 목도리를 장롱 속에 꼭꼭 감춰뒀다가 식구 모두 잠든 밤 슬그머니 꺼내 가슴에 품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시던 모습이 선연하다.

그런데 이젠 그 눈물의 목도리를 눈만 뜨면 너무도 태연하게 매고 계신다. 마치 같이 있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우리에게 하소연하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진다. 겨울날 아침, 하얀 여름 옷 입으시고 보라색 목도리 두른 채 방안에만 계시는 천사 같은 우리 엄마. 평생 남편.자식 뒷바라지와 거친 농사일에 지쳐 고생만 하신 당신. 부디 예전의 맑은 눈으로 허리 꼿꼿이 펴고, 목도리 장롱에 꼭꼭 숨겨놓고, 햇살 좋은 마당으로 환하게 웃으며 걸어 나오시길 빌게요.

안종란(49.주부.부산시 구서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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