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시위… 「시국치안」에 골머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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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91년 현재 전국에는 2백8개 경찰서 아래 3천3백13개 지·파출소가 있다.
그중 도시지역의 파출소가 1천8백58곳, 농어촌치역에 설치되는 지서가 1천4백55곳이다.
명동파출소장은 이처럼 전국에 거미줄처럼 깔린 치안조직의 최일선 기관 1천8백58곳 파출소 책임자중 한사람이다.
적어도 과거엔 그랬다. 그러나 다른 모든 조직이나 자리가 그러하듯 파출소장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다.
명동파출소장은 이를테면 「파출소장 가운데서도 파출소장」이라고나 할 수 있는 위치다.
그것은 전적으로 명동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에서 비롯한다.
최근 10여년 새 강남의 신흥상권 부상으로 옛날의 번창과 영화가 다소 퇴색됐다고는 하나 명동은 한국의 근대 상업문화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서울의 「노른자위」다.
은행·증권회사를 비롯, 금융기관이 밀집돼 있고 수많은 상가· 백화점· 호텔 그리고 유흥업소 등이 줄이은 화려한 거리는 오늘도 전국에 새로운 유행과 소비를 전파하는 거대한 한 중심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같은 명동의 성가는 땅값만으로도 쉽게 실증된다.
26일 서울시가 조사해 발표한 서울시내 98만4천여필지 토지가격을 보면 가장 비싼 곳이 부동산 붐의 진원인 영동이 아니라 상업은행 지점이 위치한 명동2가50의 4일대다. 값이 평당 1억4천2백14만9천4백만원. 그야말로 금싸라기다.

<일제 때부터 실시>
명동파출소는 바로 전국최고 금싸라기 땅에서 불과 20m여 거리에 자리 잡았다.
「황금땅」에 터잡은 명동파출소의 전신은 1920년 일제가 설치한 조선총독부 경무부 경성남부경찰서 명치정파출소다. 해방 후 서울중부경찰서 명동파출소로 새 출발해 오늘에 이른다.
불행히도 6·25기간 중 각종 기록이 소실돼 경찰이 보관하고 있는 인사기록으로는 1952년 발령 받아 54년2월까지 2년2개월 재임한 박용준 경사가 확인되는 첫 파출소장이다.
박씨는 파출소장직을 떠난 그해 9월 의원면직 된 것으로 되어있으나 생존여부나 근황이 분명치 않다.
이후 현재의 박만식 경위까지 명동파출소장을 역임한 경찰관은 모두 55명, 한 사람이 평균 8개월 남짓 재임한 셈이다.
그중 56년10월부터 6l년7월까지 자유당말기, 4·19, 5·16의 혼란기에는 5년이 채 못되는 기간에 무려 18명의 파출소장이 갈려 경찰 인사행정의 난맥상을 엿보게 한다.
특히 60년3월부터 61년7월까지 1년반 사이엔 8명이 바뀌어 재임기간이 한달도 못되는 파출소장이 5명이나 나타난다.
61년7월부터 62년1월까지 6개월간 재임한 박정덕 경사의 경우 그 이전 58년1∼3월, 60년 5∼7월 단명소장을 역임한뒤 세번째로 부임해 유일하게 「삼수(?)」를 기록했으면서 전체 재임기간은 1년이 못되는 진기록도 남기고 있다.
박 소자은 이후 경위로 진급, 서울시내 여러 경찰서를 돌며 근무하다 80년7월 공무원 숙정 당시 의원 면직됐다.
박씨 외에 명동파출소장직을 중임한 사람은 ▲양형택 경사(58년8∼12월, 59년10∼60년3월) ▲김명재 경사(63년10∼65년6월, 66년8∼67년2월) ▲천광식 경위(72년7∼74년2월, 76년1∼8월) ▲박명섭 경위(80년10∼11월, 82년4∼83년6월) 등 4명.
60년부터 31년간 명동과 인연을 맺어온 중부경찰서 외근계주임 엄기춘 경위(51)는 『명동파출소장 자리가 일제이래 경찰조직 안에서 인기있는 자리였지만 특히 빛을 본 것은 60년대 이후 70년대까지』라고 했다.
바로 명동의 상업경기와 비례했다는 얘기가 된다.
고참 경위(초기에는 경사)가 나가는 경찰로선 말단 기관장 자리지만 어엿한 지휘관인데 무의 질과 양 「실속」에서 웬만한 경찰서장은 저리가라여서 「빽 없이는 못 가는 자리」였다는 것이 엄 경위의 증언이다.

<유동인구 전국 1위>
경찰 업무규정상 파출소는 ▲각종범죄신고 및 민원접수처리 ▲방범순찰 ▲호구조사 등 외근심방 등 기본근무와 ▲교통정리 ▲주요시설 경비 등 특수근무 외에 ▲고물상·전당포 등외영업감사 ▲우범자보호관찰 ▲미아·정신병자 등의 보호 및 수배 ▲여론·첩보수집 ▲치안관련 주민계도 등의 활동을 하도록 되어 있다. 파출소장은 이를 총괄 지휘·감독하는 책임을 진다.
명동의 경우 상주 주민이 전국 파출소 가운데 가장 적은 대신 유동인구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특성 때문에 특히 방범·순찰·검문·미아보호 등 활동이 근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명동파출소가 가장 활기(?) 넘쳤던 시절 명동은 전국 유흥가의 총 본산이기도 했다. 50년대부터 이름난 「은성」 등 격조 있는 술집을 비롯, 맥주홀·바·카바레 등이 1백여곳 넘게 호황기를 구가하던 시절 명동파출소는 매일 밤 통금을 넘긴 주당들의 주정과 고함으로 장터를 방불케 했다.
낮이면 최고 1백만명까지 헤아리는 인파를 상대로 하는 소매치기의 「황금어장」이어서 범행감시에 경찰관들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던 명동은 80년대 이후 강남의 신흥 상권형성과 함께 활기를 잃어갔다. 특히 87년 이후 명동성당이 「민주화」시위와 농성의 메카로 떠오르면서 명동파출소는 시위진압본부, 화염병 공격의 표적으로 돌변했다.
학생·시민의 구호와 노랫소리, 화염병과 최루탄이 허공을 교차하는 「그날」이면 보호철망으로 중무장한 명동파출소의 문은 안으로 꽁꽁 걸어 잠근다.
지난해 11월 부임한 박만식 경위는 지금까지 네 차례의 파출소피습을 큰 사고 없이 견뎌냈지만 『언제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불안하다』고 했다.
지난달 18일 강경대군 장례식이 끝난 뒤 연세대에 있던 「공안통치분쇄와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국민회의」(구 범국민 대책회의)가 명동성당으로 옮겨온 다음부터는 민생치안이라는 본연의 업무는 사실상 포기상태에 빠졌었다.
같은 달 25일에는 시위도중 숨진 성균관대생 김귀정양 시체가 인근 백병원으로 오고 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연일 시위와 농성이 계속됐다.
김양 장례는 다행히 별탈 없이 끝났지만 명동성당 문화관에는 전민련 서준식 인권위원장, 국민회의 이동진 대변인·최종진 사무처장, 서 노협 이순형 의장권한대행 등 4명의 수배자를 포함해 30여명의 농성자가 남아있는 「비상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명동성당사태의 현장상황본부인 이 파출소는 관할 중부경찰서 주요간부는 물론 내무장관· 치안본부장· 시경국장 등 경찰수뇌부가 수시로 현장을 방문하고 있어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집주인 격인 명동파출소장은 까마득히 웃자리인 상관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앉아 뒤치다꺼리나 하게된다.
현재 국민회의관계자들이 장기농성 중인 성당구내문화관은 7년전인 84년7월16일 오후2시15분 여자암달러상 3명 등 4명의 피살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당시 최재삼 중부서장을 본부장으로한 수사본부는 범인을 신부나 신자를 사칭한 50대 남자로 추정하고 수사를 벌였지만 사건은 현재까지 미궁에 빠져있다.
이후 사건현장인 문화관은 입구에서 천주교 서울교구법원사무실에 이르는 15m의 으슥한 통로를 중간에서 막고 법원으로 통하는 출입구를 종전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옮기는 등 구조가 크게 바뀌었다.
그러나 국민회의 농성이후이같은 사실을 모른채 다른 경찰서에서 지원 나온 수많은 사복체포요원들은 『성당에 외부로 통하는 비밀 문이 있다』는 소문에 크게 긴장하기도 했다.
명동파출소장 출신으로 경찰의 고급간부까지 승진한 사람은 매우 적다. 이는 대개 파출소장직을 고참 하위직으로 보임하는 인사관행 때문에 대부분 계급·연령 정년으로 퇴직한 때문이다.
74년 2∼5월 단기간 파출소장을 역임하고 제주도 전경대강·고속도로순찰대장을 거쳐 88년 총경에 진급, 90년경기도 고양경찰서장으로 재직 중 지난1월 의원 면직된 박양행씨가 가장 고위직에 오른 사례.
명동은 최근 상가번영회의 청원에 따라 중구의회가 「평화의 거리」로 선포했다.
더 이상 명동을 「시위·농성의 거리」로 내놓지 않겠다는 지역상인들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명동이 진정한 평화와 낭만이 넘치는 번영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명동 밖」의 갈등과 모순이 평화적으로 해결돼야한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명동파출소장이 다시 옛날만큼 좋은 자리가 되자면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이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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