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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철새가 옮겼을 가능성 커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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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해마다 겨울 철새가 많이 찾는 충남 천안시 풍세천과 미호천의 야생 청둥오리 분변에서 조류 인플루엔자(AI) 바이러스가 검출됐다고 농림부가 21일 밝혔다. 그동안 철새의 분변 등에서 저병원성 AI 바이러스는 여러 차례 검출됐으나 고병원성은 처음이다.

농림부 김창섭 가축방역과장은 "분변 검사만으로는 단정할 수 없지만 철새가 AI 매개체일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각 자치단체와 양계농가 등은 철새와의 접촉 차단에 비상이 걸렸다.

이와 관련, 농림부는 최근 집단 폐사 신고된 풍세면 용정리 신모씨의 산란계 사육 농장에 대한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의 진단 결과, 고병원성 AI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충남 아산시에서 네 번째 고병원성 AI가 발생한 이후 한 달 만이다.

◆AI 발생지는 모두 철새 서식지 주변=그동안 철새가 AI를 전파하는 '주범'이라는 주장은 국내외 전문가들 사이에서 수없이 제기돼 왔다. 그러나 발생 경로 등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바람에 환경보호주의자 등의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전문가들이 AI 전파 주범으로 철새를 지목하는 이유는 발생 지역마다 철새도래지나 철새가 서식하는 하천.저수지가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번에 AI가 발생한 천안시 풍세천에는 청둥오리 등 해마다 수천 마리의 철새가 날아든다. 풍세면 용정리 양계 농가는 3년 전인 2003년 1월에도 AI가 발생한 곳이다. 지난해 12월 발생한 아산시 탕정면 갈산리 농가 근처에 있는 곡교천에도 겨울 철새가 많다.

그뿐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AI가 발생했던 전북 익산시 함열읍과 익산시 황동면 등도 철새 도래지인 금강 하구에서 불과 10㎞ 떨어져 있다. 또 2003년 발생한 충북 음성과 충남 천안시 북면 운용리와 직산읍 판정리 일대에도 철새가 서식하는 하천과 저수지가 인접한 곳이다.

충남대 서상희(42.수의학과) 교수는 "해마다 시베리아에 집결하는 동남아의 철새들이 서로 바이러스를 옮긴 뒤 다시 각국의 철새 도래지로 퍼뜨리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철새를 막아라"=충남도는 철새 도래지 하천 주변에서 가금류 사육을 금지하는 방안을 마련키로 했다. 박윤근 충남도 농림수산국장은 "이런 방안을 최근 박홍수 농림부 장관에게 건의해 긍정적 답변을 받아냈다"고 밝혔다.

정윤택 서산시 축산해양과장은 "농장 주변에 훈련이 잘된 개를 배치해 철새가 접근하면 쫓아내는 방법도 효과적일 것"이라고 했다.

양계 농민 황영도씨는 "그동안 농장 주변에 그물망과 바람이 불면 움직이는 긴 풍선을 설치해 봤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며 "정부 차원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답답한 정부=농림부는 풍세천 인근 지역 농장에 대한 AI 바이러스 검사를 강화했다. 그러나 이동하는 철새를 일일이 조사하거나 막을 수 없어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농림부 관계자는 "닭과 오리 등을 지붕이 있는 축사 안에서 키우는 것이 현재로선 최선의 방법"이라며 "일반인들도 철새 도래지 방문을 자제해 달라"고 말했다.

질병관리본부 박옥 전염병감시팀장은 "철새의 배설물로 인해 일반인이 AI에 감염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지나친 불안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며 "그러나 죽은 야생 조류를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서형식.김방현 기자




3년 만에 재발 천안 '벌말마을'

"그렇게 방역했는데 … 재기 꿈도 사라져"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경비까지 모아 방역작업을 했는데 또 이런 일이…. 날아다니는 철새를 무슨 수로 막겠습니까."

3년 만에 조류 인플루엔자(AI)가 재발한 충남 천안시 풍세면 용정2리 '벌말마을'은 21일 오전 적막감이 감돌았다.

마을 입구 두 곳에는 천안시청 직원들이 출입통제 소초를 설치하고 외부인 출입을 철저히 막았다. 공무원과 용역회사 직원 등 50여 명만이 마을 안쪽에서 살처분 작업을 하고 있을 뿐 인적이 뜸했다.

통제소 밖에서 100m쯤 떨어진 마을 안쪽에서는 일부 주민이 모여 걱정스러운 듯 서성이고 있었다. 주민 신원섭(55)씨는 "하늘이 무심하다"며 울먹였다.

12가구 3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이 마을은 다른 마을과 500여m 떨어져 육지 속의 섬처럼 돼 있다. 주민들은 2003년 1월 26일 AI가 발생, 닭 22만 마리와 돼지 5000여 마리를 살처분해 12억원의 피해가 났다. 또 당시 두 달 가까이 외부와 단절된 채 '감옥생활'이나 다름없는 고통을 겪었다. 당시 주민 가운데 3가구만 이사 등의 이유로 주인이 바뀌었다.

주민들은 "재기의 꿈마저 사라지는 것 같다"며 "더 이상 이 마을에서 닭을 기르기는 힘들 것 같다"고 한숨지었다. 이번에도 닭 27만3000마리와 돼지 6000마리를 모두 살처분해야 한다. 주민들은 지난해 가을 철새가 날아들기 시작하면서 방역에 바짝 신경을 써왔다고 한다. 지난해 10월에는 가구당 20만원을 내고 면사무소와 축협 등의 지원으로 방역비 600여만원을 마련했다.

주민들은 이 돈으로 방역차량 한 대를 임차해 일주일에 1~2차례씩 계사와 축사를 소독했다. 또 철새 분뇨 등이 날아드는 것을 막기 위해 축사를 비닐로 덮고, 주변에 그물도 설치했다. 2~3일에 한 차례 환기시킬 때를 제외하곤 사육사 보호비닐을 걷지 않았지만 이런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됐다는 반응이다.

3년 전 2만2000여 마리를 잃은 데 이어 이번에 5만4000여 마리를 살처분한 신원섭씨는 "양계가 지긋지긋해졌지만 다른 생계 수단이 없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주민은 외부와의 연락도 끊고 두문불출하고 있다.

성기훈 풍세면장은 "벌말마을은 물론 인근 농민들은 지금 정신적으로 공황상태일 것"이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방역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왔는데도 AI가 발생해 좌절감은 말할 수 없이 크다"며 한숨을 지었다.

천안=김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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