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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유토리 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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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3.141592653…. 원주율 π는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소수다. 원주율 숫자를 외우는 것으로 기억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 세계 기록은 지난해 꼬박 16시간 반 동안 소수점 아래 10만 자리까지 암송하는 데 성공한 일본인 하라구치 아키라가 갖고 있다.

학교에서는 원주율의 근삿값으로 3.14를 대입하는 게 보통이다. 가령 '반지름×반지름×3.14'라는 공식으로 원의 넓이를 계산하는 식이다. 그런데 많은 일본의 초등학교에선 π에 3을 대입한다. 문부과학성의 학습지도 요령에 '목적에 따라 3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비판이 쏟아지자 문부성은 "3.14든 3이든 어차피 근사치에 불과하다. 진짜 중요한 것은 원주율의 개념을 정확하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반론했다.

일본에서 'π=약 3'이 된 것은 이른바 여유(餘裕) 교육(유토리 교육) 때문이다. 1976년부터 단계적으로 도입된 유토리 교육은 과도한 주입식 교육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됐다. 소화도 못할 내용을 학생들의 머리에 강제로 주입시키기보다는 꼭 필요한 내용을 확실하게 가르친다는 이념이다. 학생들의 창의력과 자율성을 존중하고, 문제의 해답을 가르치기보다는 해결 능력을 길러준다는 발상이다. 그에 따라 교과서는 얇아지고 수업시간 수도 과거에 비해 70%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처음엔 환영을 받았던 유토리 교육이 최근에는 학력저하의 주범으로 뭇매를 맞고 있다. 이공계 대학 신입생이 "2분의 1+3분의 1=5분의 1"이라고 대답하는 현실은 학교에서 공부를 안 시킨 결과라는 것이다. 2004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학력조사에서 일본 학생들의 성적이 중위권으로 떨어졌다. 급기야는 아베 신조 총리가 나서 유토리 교육의 철폐를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여유만 강조하다 공부를 소홀히 하는 풍조를 길렀다는 반성에서다.

일본과 달리 한국 학생들은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탈이다. 보충수업에 학원과외는 기본이고 저학년이 고학년 과정, 중학생이 고교 과정을 앞당겨 배우는 선행학습이 성행한다고 한다. 그런 공부는 대체로 주입식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종합적 사고력과 논리력을 기르는 논술 교육마저 모범답안을 달달 외우게 한다니 말이다. 시험만 끝나면 깡그리 잊어 먹는 일회용 지식을 습득하느라 밤을 새우는 것만큼 극심한 자원낭비도 없다. 정작 유토리 교육의 정신이 필요한 것은 한국의 교육 현장이 아닐까.

예영준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