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된 것이 좋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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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에 대한 예우가 달라지고 있다. '한물 갔다'가 아니라 '고풍스럽다'다. 이른바 '빈티지의 재발견'이다. 서양에서는 이미 생활 깊숙이 뿌리내렸지만 우리나라의 빈티지 문화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그래서 이들 '삼총사'의 행보는 퍽이나 도드라져 보인다. 이들에게 빈티지는'지나간 어제'가 아닌 '새로운 내일'이다. 중앙일보 프리미엄이 만났다.

◇지미기/ 빈티지 의류 숍 '코베트' 오너

모델, 파티 플래너, 가방 디자이너로도 모자라 빈티지 숍 '코베트' 사장 타이틀까지 얹은 신인류-. 지미기를 이제 막 오픈한 신사동 가게에서 만났다. 안으로 들어서니 빈티지 의상과 액세서리가 잠시 눈에 설다 익어온다. "어릴 적엔 엄마 옷장에 있는 옛날 옷들을 몰래 입어 보곤 했어요. 그러다 뉴욕의 대학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빈티지 의상에 빠져들기 시작했죠."

뉴욕은 그를 빈티지 매니어로 만들었다. 주말이면 길거리 곳곳에서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내고, 빈티지 페어에도 참석했다. 그는 '나만의 아이템'을 최고의 매력으로 꼽았다. 요즘 옷과는 전체적인 실루엣부터 다르다. 디자인과 패턴 역시 독특하다. 드물다는 건 특별하다는 의미다. 빈티지에 빠져드는 이유다.

"각각의 옷은 다 주인이 있어요. 옛날 옷에도 사이즈는 있지만 지금과는 다르기 때문에 직접 입어봐야 알 수 있죠. 그 옛날 날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운명적인' 옷을 만났을 때 그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지요." 그의 예찬이 꼬리를 문다. 무조건 오랜 시간을 버텨 온 가구를 앤티크라 하지 않듯 옛날 옷이나 액세서리라고 다 빈티지는 아니다. 심미안이 필요하다.

"LA와 뉴욕에서 빈티지 숍과 마켓을 많이 찾아 다녔어요. 지금 코베트를 채운 옷들은 모두 그곳에서 구입한 것들이죠. 앞으로는 유럽시장에서 많은 아이템을 가져올 생각이에요."

그는 자신의 빈티지가 '진짜 주인'을 만날 때 가장 설렌다. 그 설렘이 있는 한'신사동 그사람'의 보물찾기는 지구촌 곳곳에서 계속될 듯하다.

◇류은영/ 빈티지 백 리폼 디자이너

류은영은 빈티지 가방을 리폼하는 디자이너다. 그는 뉴욕의 예술가들로 북적이는 동네인 브루클린에 산다. 대학시절 방학때마다 빈티지 매장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빈티지의 매력에 눈을 떴다. 그는 연도별로 빈티지 청바지를 구분하는 법이나 리바이스 라벨 색이 몇 년부터 바뀌었는지, 빈티지와 관련된 히스토리를 자연스레 배우게 되었다. 국내 의류 브랜드에서 일할 때도 출장가면 앤티크 마켓·벼룩시장을 섭렵했고 관련강좌는 열일 제치고 찾아가 들었다. 오늘 그의 자리는 이런 빈티지 사랑의 결과다.

몇년전 자신의 70년대 디올 가방에 빈티지 레이스를 붙여 리폼했는데, 하고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샀냐"며 관심을 보인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파리·런던·뉴욕 등에 흩어져 있던 사연 담긴 빈티지 재료를 조합해 하나의 가방을 만든다. 각각의 가방엔 고유의 이름과 히스토리가 붙는다. 가방 브랜드 '히스토리'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는 빈티지 매니어답게 1970~80년대의 디올 자카드 백을 여럿 갖고 있다. 수집 품목도 시계·의자 등 다양하다. 특히 20~70년대 여성용 시계는 요즘 제품은 흉내낼 수 없는 디테일이 매력적이다. 그는 다음달 말 청담동의 전시공간 '타스칼레'에서 그간 모아온 빈티지 소품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오중석/ 올드'미니 쿠퍼' 매니어

논현동 '지니어스 스튜디오' 실장 오중석. 패션 사진가로 이름난 그는 빈티지 자동차 매니어다. 오래전부터 빈티지 '미니 쿠퍼'를 선망하던 끝에 재작년 인터넷에 '올드 미니'를 구한다는 광고를 올렸다. 부산에서 연락이 오자마자 KTX에 올랐다. 차 주인이 10년 전 이탈리아 유학시절 남편으로부터 프러포즈 선물로 받았다는 올드 미니는 그렇게 그의 애마가 됐다.

요즘 미니 쿠퍼는 정식 수입돼 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올드 미니는 손꼽을 만큼 귀하다. "보고 또 보고, 아무리 봐도 또 보고 싶어요. 2~3년 쓰면 싫증나는 가전제품과는 다르죠."

그는 애마가 천수(天壽)를 다할 때까지 타고 다니다 엔진박동이 멈추면 개조해서 책상으로라도 쓰겠단다. 한번 수리하려면 만만치 않을 것 같다고 하자 "첨단장비가 갖춰진 차가 아니라 핵심부분만 있어 별 어려움은 없다"면서 "에어컨이 없어 여름나기가 버겁다"고 웃는다.

그가 꿈꾸는 두 번째 자동차는 40년이 넘은 포르셰 356이나 벤츠 190이다. 혹시 길에서 옛 냄새 폴폴 나는 포르셰나 벤츠를 만난다면 오씨일 가능성이 높다.

프리미엄 조세경·심준희 기자
사진 제공=지니어스 오 스튜디오, 류은영

▶빈티지(Vintage)
원래 오래된 포도주 혹은 그 원료인 포도 수확 연도를 뜻하는 용어가 요즘 젊은 층이 즐겨찾는 중고 의류 등에 확산돼 쓰인다. 마니아들은 숙성된 포도주가 좋은 맛을 내듯이 색 바랬거나 구겨진 옛 옷이 포근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이런 경향이 가방.액세서리.자동차 등으로 퍼져 '빈티지 룩'을 탄생시켰다. 옷은 통상 25년 이상 된 것들인 데 의도적으로 창고에 방치해 옛 것처럼 만들기까지 한다. 과거 유행 스타일을 새 상품에 반영한 '빈티지 스타일'이 종종 빈티지와 혼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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