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결로는 민주화 안된다/신성순(중앙칼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강경대군 치사사건에서 비롯되어 여야의 극한 대결이라는 상황까지 연출하고 있는 요즘의 시국은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화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원론적인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그것은 잇단 분신자살로 사건을 확대시켜온 일부 학생·근로자들이나 이들이 연출한 상황에 편승해 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야권이나 이들의 움직임을 싸잡아 정치공세로 인식하고 강경대응자세를 굽히지 않고 있는 정부·여당이 모두 민주수호를 앞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이 민주화를 추구한다면서 어느쪽도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적 방법으로 사태를 풀어나가기는 커녕 오히려 대결구도를 굳히고 있다면 이들이 주장하는 민주화의 실체는 어떤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어느쪽에고 그나름의 논리는 있다. 언로의 자유가 보장돼야 하는 민주질서 아래서 정당한 의사표시의 한 방법인 집회와 시위를 원천봉쇄한다는 정부의 자세가 공안을 내세운 강권정치,탄압정치의 전조라고 해석하고 이의 철폐를 관철하는 것이 민주화의 길이라는 야권의 주장에도 수긍가는 대목이 있다.
반대로 민주주의란 민주적 법질서의 존중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정당한 절차를 거쳐 제정된 법률을 어기는 행위를 제재하는 것이 어째서 강권통치냐는 정부·여당의 논리에도 공감이 간다.
현시국의 발단이 된 강군치사 사건의 경위만 보아도 이같은 양측의논리가 첨예하게 맞서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듣기로 강군치사사건으로 번진 명지대사태의 전말은 이렇다.
대학등록금 동결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일부 과격학생들이 총장실을 비롯한 학교기물을 부쉈고 이 때문에 기물손괴혐의로 학생회장이 수배되었다. 수배됐던 학생회장은 후에 모여대에서 경찰에 검거됐다. 그런데 학생들의 시위현장에서는 시위진압에 나섰던 전경대원 한명이 학생들 손에 잡히는 일이 벌어져 학생들과 전경사이에 서로 상대방 손에 있는 두사람을 교환석방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져 각서까지 교환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잡고있던 전경을 풀어주었는데 경찰측은 엄연한 범법자를 풀어줄 수 없다해 구속하고 말았다.
경찰의 약속파기에 분노한 학생들은 학생회장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다 결국 강군이 희생되는 변을 당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몇명의 학생들과 근로자들이 잇따라 분신하고 야당이 이에 가세,민주화 개혁과 내각총사퇴를 요구하는 사태로 번지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어느쪽의 잘잘못을 한마디로 논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의 민주제도라는 것이 턱없이 취약한 기반위에 서있어서 조그만 충격에도 전체의 틀이 흔들릴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질서란 스스로 만든 규범을 지키는데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그같은 형식논리에 앞서 건전한 양식과 인권을 중히 여기는 정신적 토양을 필요로 한다.
내 권리가 소중한 동시에 남의 권리도 소중하고 내 논리가 정당하다고 믿지만 남의 논리도 정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성숙된 시민의식이 법규범의 틈새를 메워줌으로써 비로소 성공할 수 있는 것이 민주제도요 민주질서다.
우리는 법률제도적으로는 어느선진국 못지 않은 민주체제를 갖추고 있지만 이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의 의식구조는 가부장제적 권위주의와 극단적인 저항정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정신적 토양아래서 민주주의를 정착시킨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다고 민주화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길이 멀고 험하더라도 자유로운 민주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집권자가 솔선수범해야 한다. 우리의 의식에 아직 유교적 가부장제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 만큼 사회의 개혁에는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가장 효과가 크다.
지도자가 나는 「바담풍」하더라도 너는 「바람풍」하라고 해서는 「바람풍」이라는 정확한 발음을 애시당초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나는 법질서를 지키니 너도 법질서를 지키라는 형식논리만을 앞세워서는 안된다.
불행하게도 우리 국민들은 그같은 논리에 너무 많이 속아왔다. 「공안이란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자는 얘기인데 공안정국이 무엇이 잘못됐느냐」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들리지 못하고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현시국은 어느 한쪽의 잘못으로만 책임을 돌릴 수 없다.
합리적 논의보다 시위로 매사를 해결하려는 일부학생이나 근로자,이같은 젊은이들의 행태에 편승하려는 야권,질서유지라는 형식논리만으로문제를 풀려는 집권층 모두에게 문제가 있다.
그러나 해결의 실마리는 집권 여당이 주도권을 잡고 찾아야 한다.
그것을 꼭 현정권의 잘못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과거 역대정권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아래 국민을 기만해 온데 대한 업보라고 생각하라.
그러나 동시에 겸허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국민의 눈에 책잡힐 일은 없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 대통령주변의 인사문제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민생문제가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됐는지 반성해야 한다.
정말 민주제도를 정착시킬 의지가 있다면 살을 도려내는 아픔까지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