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가속·물가억제 급하다|혼미정국 긴급진단(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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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한 젊은이의 죽음으로 시작된 위기국면이 날로 혼미해져 가고있다. 오늘의 시국이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비롯됐고 그 현재적 의미는 무엇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보다 과학적인 시각에서 우리사회를 분석·연구해온 학자들의 좌담을 통해 현 시국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들어본다. 좌담에는 황성모 교수(65·사회학·정신문화연구원) 이명현 교수(49·철학·서울대) 심윤종 교수(50·사회학·성균관대)가 참가했다. 【편집자주】
황성모=「현 상황은 과연 위기인가」라는 진단부터 해보죠. 위기란 구조적 모순이 축적돼 폭발한 것이며, 나아가 혼란과 변혁을 가져오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관점에 따라 진단도 다르리라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명현=현 상황은 분명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현 시국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명지대생 강경대군 치사사건은 사실 한 사학의 내부 문제라는 작은 것에서 출발했잖습니까. 문제는 그것이 왜 이렇게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강군 사건이 불길을 댕겼을 때 폭발할 수밖에 없는 가스가 우리사회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모순의 축적이라 할 수 있죠.
폭발가스는 크게 두 가지 성분으로 대별할 수 있죠. 첫째는 경제문제입니다. 오래지 않은 과거에 우리는 열심히 일하면 집도 사고 자식교육도 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죠. 천정부지로 뛰는 물가, 부동산 가격은「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꺾어버렸습니다.
둘째는 정치문제죠. 예민한 정치감각이 없더라도 누구나 최근 민주화가 속 시원히 진행되지 못하고있는 현실에 답답해합니다.
그 결과가 곧 정치에 대한 무관심·냉소주의며 지난 기초의회 투표율로 나타난 것 아닙니까.
심윤종=저 역시 위기국면으로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87년 6월과 갈이 벼랑 끝에 선 위기상황보다는 훨씬 극복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위기국면의 근원은 이미 3공 때부터 쌓여온 경제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군요. 한마디로 경제발전·부의 분배에서 소외된 계층을 양산해 냈기 때문이죠. 노동자·농민·도시빈민 등은 실업·질병·노후불안정 등 항상 적인 위기감· 불안 속에 살아올 수밖에 없었잖습니까.
학생과 재야운동권의 시위가 계속되는 것도 사실은 이같은 소외계층의 공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6·29이후 집권층의 민주화 의지를 믿고 기대했는데 요즘은 오히려 옛날로 돌아간 것 같지 않습니까.
황=저는 6·29이후 큰 개혁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었죠. 왜냐하면 6·29는 방어적·수세적 해결책이었으니까요. 앞을 내다보는 개혁이 아니거든요.
문제는 이후 6공이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이죠. 합법이니 무너뜨릴 수는 없고『일단 믿어보자』했는데 불만만 쌓여 왔어요.
불만의 배경에는 경제적인 것도 있지만 더 큰 요인은 도덕성의 문제 같아요. 광범위한 의미에서의「지도층」의 도덕성 상실 말입니다.

<불로소득 추방해야>
이=저는 그것이 곧「상대적 박탈 감」이라고 보고싶습니다.
언젠가 30대 초반의 제자가 찾아왔더군요.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 아내와 맞벌이로 소형 자가용도 굴리고 매월 50만원씩 저축도 하니까 누가 봐도 빠질 것 없는 편이죠.
하지만 『집은 영원히 못살 것』이라고 절망하더군요.
그리고 일 안하고 돈만 펑펑 써대는 사람들을 욕합니다. 모두가 바르게 살면 자기도『절망까지 하진 않는다』는 거예요.
심=현 시국과 관련해 정부의 도덕성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흔히「공권력」이란 것은 말 그대로 공공이익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최근 사태들을 보면 공권력은 도덕성과 신뢰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어요.
강군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전의 수서 사건·두산 페놀방류사건·원진레이온 독가스 사건 등이 일어날 때마다 국민들은『정부는 뭘 하고있는 거냐』며 울분을 터뜨렸죠. 공권력이 국민의 기본적·권익을 보호할 의무를 이행 못하니 정경유착의 의심을 받고, 따라서 도덕성이 추락할 수 밖에요.
황=정부에 대한 불신이 증오감으로까지 번져 가는 요즘입니다. 정부는 과연 왜 이렇게 국민들로부터 외면 받는 걸까요.
한마디로「힘」이 없어서가 아니라「의지」가 없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통제경제· 명령경제의 오랜 관행 속에서 정부의 강력한 의지만 있다면 부동산·물가도 충분히 잡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조금 더 포괄적으로「정치적 도덕성」문제도 꼭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정치j적 도덕성은 우리의 정치현실에서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일관성이죠. 노선과 정책이 일관성 없이 왔다갔다하는 게 바로「사쿠라」아닙니까. 정치인이란 많은 사람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일관된 입장이 있어야죠.
둘째는「패거리」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라는 것이 전체사회의 발전이라는 공 개념을 지향해야지『끼리끼리 해먹는다』는 식으로 자기집단·패거리의 이익만 챙겨서는 안되죠.

<모두 내 탓 아닌 네>
심=민자당 출범당시까지도 많은 사람들이「안정」을 통한 민주화 발전을 기대 했었죠. 그런데 민자당은 오히려 숫적 우세로 권력독점을 강화했습니다.
황=한가지 덧붙이죠. 야당 당수로 대권에 도전했다 실패하면 당수자리를 의당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심지어는 야당으로 뽑아줬는데 여당으로 돌아서기까지 하는 것이 정치적 상식으로 가능한 얘기인가요.
이=정치에 있어서 정당한 게임의 룰(Rule:규칙)이 없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죠. 아직 공정한 경쟁풍토가 뿌리내리지 못한 상황이니 정치적 상식 밖의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뇌물사건(수서 비리)만 봐도 알잖아요. 누가 구속된 일부를『가장 더러운 자들』이라고 욕합니까. 오히려『재수 없는 사람』이라고들 말하죠. 막말로 자기 돈으로 정치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심=가끔 우리 같은 교수를 꾸짖는 정치인들을 보면 참 한심합니다. 천주교에서 시작한『내 탓이오』운동이 거국적 운동으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내 탓」이 아니라「네 탓」이라고 말들 하니 말이에요.
이=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얘기해보죠.
저는 먼저 정치인들에게「암수」를 버리고「정수」를 둘 때가 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컨대 모든 사람들이 자기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고, 그것을 한편으로 비판하고 한편으로 받아들이는 정공법을 쓰라는 것이죠.
집회·시위도 일정범위에서 보장하고, 영화나 책 정도는 마음대로 보게 해 줘야죠. 고관이나 정치인들은 북한 고위직들과 만나고 금강산 구경도 하는데 학생들이라고 북한영화를 못보게할 수는 없는 거예요. 학생들이 보고 판단하게 놓아두고 믿어야죠.
황=교과서적인 민주정치를 해보란 얘기군요.
하지만 남북 대치상태에서 공공질서가 흔들리면 국가전체가 흔들린다는 집권층의 강박관념도 현실적으로 존재하죠.
이=바로 그 점입니다. 강박관념이에요.
80년대 초 통금이 없어지면 도둑·간첩·폭력배가 들끓으리란 예상이 노파심이었음이 확인 됐잖아요. 마찬가지로 교과서적 민주화를 허용해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사회는 지금까지의 단색정치를 벗어나 보다 다양화 돼야할 때가 된 것입니다.
황=요즘은 흑백 TV가 아니라 컬러 TV시대인데 정치인들은 아직도 흑백시대에 살고있다는 얘기군요.
심=문제는 정부·지도층이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려는 진지한 태도가 없다는 점이라고 봐요. 요즘 같아선 5공 때와 다른 것이 별로 없잖아요.

<사고의 틀을 바꿔야>
황=제 생각엔 정부나 집권층이 못하는 일을 시민들이 직접 강요하고 압력을 넣는 시민운동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시민운동은 정치적 운동만이 아니라 시민들의 이익을 지키는 모든 활동을 뜻하죠. 두산 페놀방류사건 당시 시민들이 전개했던 불매운동」등이 전형적인 사례죠.
이=동감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시민운동이 성숙하지 못했던 원인도 따져봐야죠. 관변이 아닌 모든 단체는 사찰대상으로 삼아온 것이 최근까지의 정부 관행이었죠.
황=보다 크게 볼 때 사회 전반적으로 사고의 틀을 바꿔야 합니다. 새 문제를 낡은 방식으로 해결할 수 는 없는 거죠.
이=사실 우리사회의 진보세력은 과거 유럽의 진보사상에, 보수세력은 고전적 자유주의에 매달려 있습니다. 모두 시대가 지난 것들이며 우리의 이론도 아닙니다. 유럽은 이미 이런 것들을 모두 털어 버리고 21세기를 앞둔 거대한 변화를 겪고있죠.
황=맞아요. 유럽인의 관심은 온통 환경· 생태학에 쏠려있죠. 자연과의 조화를 통한 생존,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고있는 것입니다. 녹색운동이 대표적인 것이죠.
이=우리나라에서도 벌써 그런 관심은 고조되고 있습니다.『한달 물(생수)값이 쌀값보다 많이 든다』는 일부의 얘기는「건강한 삶」에 대한 의지를 웅변해주는 예죠. 산업화 이후 3백년간 서구사회를 지배해온 가치관이 변하고 있으며 그것이 벌써 우리에게도 시작된 거죠.
심=그같이 거대하고 근원적인 사고의 변화가 보다 체계적으로 인식돼야 하겠죠. 교육적 차원에서 말입니다.
황=결국 정치인뿐만 아니라 시민과 학자들까지 모두 현실로 다가온 새로운 문제들을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해결해나가는데 힘을 모아야겠군요.<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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