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마저 날치기로 하는 정치(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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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 정치는 또 한번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인권을 포함한 국민기본권 신장을 위한 개혁입법이 왜 날치기 통과란 저급의 연출로 매듭을 지어져야 하는가.
남북분단하의 체제수호를 위한다는 보안법이 58년 제정때나 33년 후 개정때나 똑같이 파동 아니면 변칙통과의 운명을 겪고 있는데 대해 허탈감을 금할 길이 없다. 그토록 중요한 법률이 굳이 일부 정파나 국민들의 극렬반대와 지탄속에 제정되고 다시 여당 단독의 날치기로 고쳐진다는 것은 아무리 의도가 수긍할만 하더라도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이같이 비정상적인 입법례가 되풀이되고 있는데도 우선 정부·여당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보며 그들의 열악한 정치력에 다시금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름의 복잡한 사정과 변명이야 있겠지만 3당통합으로 거대여당을 만든 후 민자당은 벌써 세번째 날치기 통과를 감행했다.
방송법·국군조직법의 변칙통과때도 그랬지만 민자당의 날치기 강행은 소위 정공법이란 방패를 내세운 여당식 강성기류가 너무 쉽게 당내 분위기를 압도해 버리는 속성에 기인한 바 크다.
권력이 있고 수적으로 압도적 다수인 여당이 소수의견의 존중,대화와 타협이란 의회주의 원칙을 귀찮게 여기고 다수결이란 빠르고 쉬운 선택만 하기로 한다면 정당 정치가 정상적으로 자리잡기는 힘들 것이다. 더욱이 여소야대를 국민의 표와는 관계없이 자기들끼리 일거에 뒤집은 3당통합은 집권당에 「힘의 유혹」을 선사한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여당이 힘과 오기를 앞세워 사사건건 밀어붙였을 때 직면한 모순과 파행정치를 우리는 이미 짧은 헌정사에서 수없이 목격했다. 또 대통령 주변을 강성인사들이 둘러싸고 그들의 주장이 정치판을 좌지우지 할 때 어떤 결과가 오는 지를 수없이 보아왔다.
물론 민자당으로서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통과된 법이 명백히 민주화에 도움이 되고,분명 악법이 아닌데 정치기술의 차원에서 야당이 반대하기 때문에 처리를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집권당으로서 직무유기가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다.
특히 야당의 속사정을 알고 보면 일정 몫의 악역을 자청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여당의 개정안이 개악이라고 막무가내로 몰아칠 수 없음을 내심 인정하면서도 협상을 보이콧하면서 장외투쟁을 선언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딱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처럼 국민의 이익보다는 정치권의 이해득실만으로 여당의 강행과 야당의 거부가 부닥치지 않았더라면 여야 합의로 좀 더 고칠수 있었을 부분이 간과된 실책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개정안에 들어있는 경과규정이다. 신법과 구법이 다툴 때 신법을,또 어느 쪽이든 피고인에게 유리한 쪽을 적용케 되어있는 형사법의 원리에 반해 이번 개정안은 이미 기소된 사람은 구법의 적용만을 받게 되어있다.
이 점은 정부·여당이 운용의 묘를 살려 법개정의 취지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믿고 느끼게끔 해주길 권고한다. 이제 이 법이 과연 개막인지 아니면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인권침해의 소지를 줄인 개선인지 입증할 책임은 전적으로 공안당국에 있다. 과감한 후속조치가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는 신민당의 장외투쟁이 치사정국과 맞물려 어떤 변조를 띨지 우려한다. 곧 광역의회 선거가 있을테고 그것이 끝나면 정기국회만을 남긴 13대 국회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변칙통과등 정당·정치인들이 빚은 난맥상이 이 사회를 더 혼란시키는 요인이 되지 않도록 성실한 노력을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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