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개헌, 차기 정권으로 넘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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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물론 5년 단임의 문제점은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다. 연임을 신경 쓰지 않으니 대통령의 정책 책임이 약할 수 있으며 임기 말에 여지없이 레임덕이 생긴다는 것이다. 대선과 총선의 시기가 엇갈리니 지자체장 선거까지 합치면 선거 과잉으로 정치비용이 너무 높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이번 기회가 아니면 20년 후에나 개헌할 수 있다는 주장도 일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5년 단임에 대한 옹호도 만만치 않다. 대통령이 연임에 신경 쓰면 정책이 인기영합으로 흐를 수 있고 연임을 위해 무리수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 같은 현실에서 대통령이 누릴 수 있는 프리미엄으로 현직이 무조건 연임될 소지가 높지는 않을지 따져봐야 한다. 총선과 대선의 시기가 엇갈리는 것이 오히려 유익할 수도 있다. 대통령선거 중간에 실시하는 총선은 중간평가와 국론 여과의 장(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임, 단임을 떠나 모든 게 제도보다는 사람의 문제라는 지적도 많다. 여론조사 수치로는 대체로 4년 연임이 앞선다고는 하나 압도적은 아니다. 그리고 개헌의 주체, 개헌의 시기, 부작용까지 따지면 조사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지금 여건상 개헌이 쉽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10% 내외의 지지를 받는 레임덕 대통령에다가 여당은 탈당론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의욕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겠는가. 의석 3분의 1 이상을 쥔 한나라당이 반대하는데 가능한가. 합치면 60~70%의 국민 지지율을 보유한 대선주자 3인이 반대하는데 여론이 갑자기 뒤집힐까. 대통령은 이미 행정수도라는 위헌 정책, 대연정이라는 돈키호테식 제안, 하야 가능성 시사, 그 밖의 실정(失政)으로 신뢰를 잃을 대로 잃었다. 대통령은 개헌 발의를 "권한과 의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 많은 권한과 의무 가운데 왜 하필 개헌만 붙잡는지 설득력이 약하다. 임기 1년을 남긴 대통령으로서 개헌 말고도 할 일이 너무 많이 쌓여 있다.

한나라 대선주자들은 이번 대선에서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고 국민의 심판을 받아 다음 정권에서 추진하자고 말한다. 이에 대해 대통령은 다음 대통령이 개헌하려면 임기를 1년 줄여야 하는데 가능하겠느냐고 반박한다. 그런 문제라면 대선후보들이 "국민이 압도적으로 개헌을 지지하면 임기를 줄일 수 있다"는 걸 공약하는 방법도 있다. 그런 점에서 개헌이 꼭 필요하다면 대선후보들이 공약으로 내세워 그것을 실천토록 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개헌 문제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따를 수도 있다. 대통령은 권력구조만 손을 대는 원 포인트(one point) 개헌을 하겠다고 하지만 일단 논의가 시작되면 각종 요구가 분출할 것도 우려된다. 영토조항을 고쳐야 한다, 경제조항이 낡았다는 등 여러 얘기가 나올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사회의 갈등과 긴장이 높아갈 것이다. 특히 개헌 찬반으로 사회는 다시 소용돌이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개헌 논의보다도 더 시급한 과제들로 둘러싸여 있다. 특히 노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 연금개혁, 부동산 안정, 실업문제, 북핵 해결 등 남은 1년 동안 해결해야 국정과제가 쌓여 있다. 이것을 해결하기도 역부족인데 개헌을 제기해 국론을 또 갈라놓아야 하는가. 여건은 성숙하지 않았고 부작용은 많은데 불쑥 대통령이 개헌을 얘기하니 그 의도를 의심받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이 개헌 논란을 부추겨 국면을 전환하려는 정략이 숨어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이다.

개헌 논란은 논의에서부터 발의, 국회 표결까지 시간과 국력을 잡아먹는 하마다. 이런 논의로 국력을 허비할 수 없다. 그런 하마를 아예 당분간 우리 속에 가두어 두는 게 현명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