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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품위있는 죽음을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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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뇌사자 판정을 받은 아버지에게 한달이 넘도록 인공호흡기를 붙여 놓은 후배의 눈물을 보았다. 환자에게 베풀고 있는 의료진의 심폐소생술이 결국은 죽음의 연장에 지나지 않으며 그 모습 또한 너무 고통스러워 지켜보기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30대에 이른 그의 두 남동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인공호흡기를 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어서 어떤 단안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한다. 생전에 그의 아버지는 각 분야에서 존경받는 원로들조차 인공호흡기에 매달리다 세상을 떠난다는 뉴스에 접할 때마다 "나는 저런 모습이 되고 싶지 않다"고 되뇐 점을 동생들에게 설명하고 아버지가 집에서 식구들에게 둘러싸여 편안하게 돌아가시도록 하자고 했으나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친척들에게 불효자나 패륜아 정도로 비춰질까 두려워하고 있다. 상속 재산 다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치료에 따른 경제적 부담이 크기 때문도 아니란다. 아버지가 당하는 고통의 연장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 그런 치료가 과연 효도인가 하고 묻는다. 그는 죽음이라는 자연의 한 과정을 받아들이며 운명하는 아버지의 그리운 모습을 간직하고 싶어한다.

나는 최근에 가족의 병간호를 위해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다 죽음의 공포에 몰려 있는 많은 환자를 눈여겨보았다. 중환자실이나 일반병실의 식물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내 주변의 환자가 겪고 있는 몸서리칠 만한 고통에 가슴이 미어지기도 한다. 오래 전에 읽은 솔제니친의 '암병동'이나 카뮈의 '페스트'는 무서운 질병이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주민들의 생활에 치명적인 충격을 주었으며 그 역병에 대처하는 인간의 다양한 자세가 너무 황폐화했다는 기억을 남겨 주었다. 그처럼 처절하고도 고독한 환경은 시대를 달리하고 상황이 바뀐 지금도 주요 병원의 암병동에서 목격할 수 있다.

국민 네명 가운데 한명이 암으로 고통받고 있거나 숨지고 있다는 현실이 우리에겐 커다란 질곡이다. 의료기술이 발달하고 엄청난 투자가 이뤄져도 임종환자는 늘어만 간다. 인공호흡기의 개발로 죽음을 늦출 수 있는 기회는 많아졌다. 그러나 환자와 가족들은 다시 인간적인 고뇌에 시달린다. 최후가 임박한 환자에게 심폐소생술과 함께 인공호흡기를 강력히 권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윤리문제에 직면한다.

미국 등 주요 국가에서는 환자가 생전에 이런 서약을 한다. 자신이 더 이상 살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판단이 있을 때 심폐소생술을 사용하지 말라는 생전 유언(Living Will Declaration)을 대부분 남긴다. 이들 국가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인공호흡기를 거부하며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편안하게 숨을 거둔다.

국립암센터의 윤영호 박사(삶의 질 향상 연구과장) 등이 추진하고 있는 '품위있는 임종을 위하여'라는 캠페인은 말기암 환자가 고통없이 치료받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으며 품위있는 죽음이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문화와 관습은 서양의 그것과 다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외롭게 죽어가는 환자는 계속 증가하고, 핵가족화에 따라 환자간호가 더 어려워지는 이 삭막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다가 죽어가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다. 품위있는 임종을 위하여 이제 우리 사회 각 분야 지도자들도 무의미한 치료의 중단을 요구하는 생전 서약을 유언으로 남기는 것이 어떨까. 환자 본인과 그 가족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을 생각할 때다.

최철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