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Blog] 배역 이름은 암호 … 해독해 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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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임상수 감독의 1980년대 멜로 '오래된 정원'에는 영작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조연급의 열혈 운동권입니다. 운동권을 도우면서도 냉소적인 한윤희(염정아)는 영작과 헤어지는 장면에서 느닷없이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봅니다. 그러곤 "쟤가 나중에 인권변호사가 됐대요"라고 말합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임 감독의 '바람난 가족'(2003)의 주인공 영작(황정민)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람난 가족'은 욕망의 시대인 90년대를 언급하는 영화입니다. 영작은 잘나가는 386 인권변호사지만, 충족되지 않는 성적 결핍에 시달리며 외도를 합니다. 평범한 주부인 아내 호정(문소리)은 그녀대로 옆집 고등학생(봉태규)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요.

두 이름은 감독의 데뷔작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에도 나왔습니다. 젊은 여성들의 성적 발견을 그린 이 영화에서 호정(강수연)은 유능한 커리어 우먼에 프리섹스주의자이고, 영작은 바람둥이(조재현)로 나왔습니다. 성에 무지하고 고지식한 대학원생 순이(김여진)는 영작과 우연찮게 섹스를 하게 되는데, 임 감독은 '바람난 가족'의 호정은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순이가 결혼한 다음의 모습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임 감독은 영작과 호정, 혹은 순이라는 이름과 배역들을 통해 80-90년대로 이어지는 시대상, 인간형을 정리해 내고 있는 셈입니다. 특히 영작이라는 인물은 남성 감독이 창조한, 일관되게 마초(macho)적이고 허위적인 캐릭터라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임 감독은 또 80년대와 오늘의 화해를 시도하는 '오래된 정원'의 중심 인물에 한윤희를 놓아 '남성 감독으로서 가장 살아있는 여성 캐릭터를 그린다'는 평가가 과장이 아님도 보여줬고요.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임수정), 일순(정지훈)이라는 이름도 흥미롭습니다. 누군가 디지털 영화인 만큼 0과 1이라는 숫자에 남녀를 뒤바꿔 '순''군'을 조합한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디지털 실험의 잔재미에 푹 빠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개연성 있는 해석이지요. 이처럼 소소하게 따져볼 해독거리들이 이 영화의 진짜 재미인데 그 점이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쨌든 사소해 보이는 배역 이름이지만 그것은 감독의 작품세계를 여는 하나의 열쇠이고, 어떤 원형적 캐릭터에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말죽거리 잔혹사'때 유하 감독은 70~80년대 폭압적인 청소년기를 지낸 현수(권상우)가 자라서 무기력한 지식인('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감우성)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극중 이름은 달라도, 원형적 캐릭터가 작품과 시대에 따라 변주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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