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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기처 장관|"과학 한국" 총수…정부 내 입지 낮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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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정보화사회와 후기 산업사회로 가면서 경제와 국민생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과학 기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기처 장관은 단순히 과학기술계나 연구소만을 대표하는 자리가 아니라 관련부처가 과학기술에 우선 순위를 두고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 나갈 수 있도록 뒷받침도 하고 조정도 해야 하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과기처 장관을 지냈던 L씨는 과기처 장관의 역할을 이같이 설명했다. 그는『그러나 다른 부처 장관들이 과학기술이 중요하다는데 인식은 같이 하면서도 국민생활과 직결된 현실적인 문제와 경합될 때는 그쪽 편을 들기 때문에 과학기술이 늘 우선 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고 안타까워하며 이것이 과기처의 한계이자 위상이고 우리 과학기술의 현주소라고 푸념했다.
또 다른 전직 과기처 장관은『국가발전의 원동력이자 추진체인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한결같이 외치면서도 정부 내에서는 정부의 서무 격인 총무처보다도 더 푸대접받고 있는, 이상과 현실사이의 엄청난 갭과 법에서는 과기처가 과학기술 관련 정책을 총괄·조정토록 해 놓고도 실제로는 그만한 수단(Tool)을 가지지 못하는 실질과 제도상의 괴리에 많이 괴로워했고, 또 외롭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위상 점차 빛 바래>
과기처가 이렇게 힘도 없고 빛도 안 나는 부처로 인식되면서 이제는 과학기술계 안에서마저 상징적인 권위자로서의 장관의 위상이 퇴색돼 가고 있는 느낌이다.
과기처가 발족된 것은 67년. 과학기술 전담 부서의 신설이 필요하다는 여론과 67년5월의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던 당시의 국내 정치 상황이 맞아떨어지면서 개발 도상국가로서는 최초로 각료 급을 장으로 하는 과학기술 전담 부서가 생겨난 것이다.
67년4월21일 서울 정동의 옛 원자력 원 청사에서 개 청한 과기처는 경제기획원 기술 관리국을 모체로 해 2실2국과 산하에 원자력 청·국립지질 조사 소·중앙 관상 대를 둔 조그만 조직으로 출범했다. 이에 따라 매년 4월21일을「과학의 날」로 정해 해마다 기념하고 4월을 과학의 달로 정한 것도 과기처 출범이 갖는 의미가 그만큼 컸던 때문이다.
그 이래 과기처 장관이 현재 13명 째 바뀌었다. 1년10개월마다 한번씩 바뀐 셈이다.
전임 12명 중 1년을 채우지 못한 장관이 8명이나 되며 80년 이후 1년을 넘긴 장관은 5대 이정오 장관과 11대 이상희 장관뿐이다.
5, 6공들어 차분히 일해야 할 과기처 장관마저 정치권의 바람을 타고 이렇게 자주 바뀜으로써 그동안 과학기술정책도 일관성 있게 굴러가지 못했다.
장관이 바뀔 때마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많이 쏟아졌으나 제대로 추진해 보지도 못한 채 정책들은 캐비넛 속으로 들어앉아야 했던 용두사미 식 행정의 연속이었다.
과기처 장관자리는 정치 바람을 탈 자리가 아니다. 과학계를 깊이 이해하는 장관이 와서 일관성 있게 국가 과학 정책을 추진해야 할 자리다.
경제과학 심의 회 상임위원으로 있다 초대장관으로 발탁된 김기형 장관(현 한국 과학 기술원 이사장·재료 공학)은「돈키호테적 발상의 명수」로 기발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놓기로 유명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67∼68년에 걸쳐 4백여 명의 전문가를 동원해「과학기술 개발 장기종합계획(67∼68년)」을 수립하는 등 초창기 과학기술 정책의 뼈대를 만든 것이다.
2대 최형섭 장관(현 포항제철 고문·금속 공학)은 과기처 역사의 3분의1인 7년 반을 재임한 최 장수 장관으로 국산 자동차주 부사장·상공부 국장·원자력 연구소장·한국 과학 기술연구소(KIST) 초대소장 등을 거친 과학의 이론과 실제를 아는 보기 드문 과학 기술 행정가로 평가받았다.
개발 도상국가의 공업화 전략에 관한 그의「최씨, 모델」은 동남아·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채용할 정도였다.
최 장관은「연구의 자율성」「재정의 안정성」「합리적 자유분위기 조성」등 그의 연구관리철학을 일관되게, 그리고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다. 또 연구원들이 장관을 언제나 만날 수 있도록 장관실을 개방하는 등 과학자의 자존심을 세워 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는 정보 산업국을 신설할 정도로 10년 앞을 내다보는 형안을 지녔지만 원자력 청을 원자력 국으로 격하시킨 점이나 KIST 일변도의 정책을 편 점, 과학기술 행정은 규모가 적을 수록 좋고 많을수록 나쁘다는「소선다악론」은 많은 사람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3대 최종완 장관(현 한국 원자력 안전 기술원 이사장·토목 공학)은 그가 주재하는 회의 때마다 혼자서 몇 시간이라도 정력적으로 얘기하는 바람에 과기처 직원들은 그를「떠 벌이 장관」으로 부르기도 했다.
4대 성좌경 장관(작고·고분자화학)은 조용하고 인자한 성품의 소유자로 재임기간이 짧아 특기할 만한 업적은 내놓지 못했다.
육사 13기 출신으로 당시 안기부 고문으로 있던 동기생 W씨의 천거로 5대 장관으로 부임한 이정오 장관(현 한국과학기술원 교수·기계공학)은 재임기간이 길었던 만큼 업적도 많이 남긴 실무형 장관.
취임하자마자「연구개발 체제 정비와 운영개선 방안」을 발표, 정부 각 부처 산하에 있던 16개 연구기관을 8개의 대단위 연구소로 통폐합하고 핵심산업 기술을 중점적으로 개발하기 위한 특정연구 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후임 김성진 장관(현 한국전산 원장·기계공학) 역시 대통령과 육사동기인데다 11기의 최고 수재였다는 점에서 그의 부임은 큰 기대를 모았었다.
중소기업 육성에 역점을 둬 틈만 나면 현장으로 나가 재임 10개월간 2백30여 개의 중소기업을 돌아다녀 상공부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7대 전학제 장관(현 한국과학기술원 교수·촉매 화학)은 전씨 문중에서 천거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의외의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는데 결국 7개월 19일만에 물러나야 했다.
그는 최형섭 장관 보다 한술 더 떠 과학기술 행정은 가만히 있을수록 최선이라는 주의로 일관했다.
8대 이태섭 장관(현 국회의원·화학공학)은 과기처 최초의「정치 장관」으로 입각 때는 김성진 장관 다음으로 큰 환영을 받았다.
「과학산업」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예산을 따는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국회의원으로 재기하기 위해 다른 일에 너무 시간을 많이 할애함으로써 결국 도중 하차하고 말았다.

<박긍식씨 최 단명>
9대 박긍식 장관(현 한국 기계 연구소 이사장·분석화학)은 5공 말기의 시한부 장관으로 뜻하지 않게 부임해 7개월 12일이라는 과기처 최 단명 장관으로 물러나야 했다.
다혈질에 일을 즉흥적으로 처리한다는 비판과 함께 예술을 알고 의리를 지킬 줄 아는 「벨기에 신사」다운 면모도 지니고 있다.
6공과 함께 신선한 인물로 꼽혀 10대 장관에 오른 이관 장관(현 21세기 위원회 위원장·기계공학)은 대학교수 출신답게 기초 과학을 가장 강조하고 세미나를 좋아했다.
장관 명을 받고 울산대 총장직을 물러나면서 『내가 장관을 그만 두면 꼭 이 대학 강단에 다시 서겠다』고 직원들 앞에서 약속을 해 놓았으나 현재 더 큰일(?) 때문에 못 들어가고 있다.
재임 시 연구소가 노조 문제로 시끄러웠으나 사태해결을 회피, 소심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으며 원전11, 12호기 도입을 둘러싼 안전성 확보문제 때문에 큰 시련을 겪기도 했다.
11대 이상희 장관(현 한국 과학 기술진흥 재단 이사장·약학)만큼 과기처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킨 장관도 없을 것 같다. 정치 장관답게 부임하면서부터 물러날 때까지 조찬회를 비롯, 각종 모임에 쫓아다니면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역설하곤 했다.
그는 창의력이 뛰어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대학 중심의 기초연구 활성화와 고급 연구인력의 양성이 중요하다고 강조, 89년을「기초 과학 진흥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한국과학재단의 기금을 늘리기에 애썼다.
12대 정근모 장관(현 아주대 석좌 교수·핵물리학)은 과학기술 정책을 수요와 공급이 균형된 시스템으로 발전시키려고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방사성 폐기물 사업과 관련한 안면도 사태로 불운하게도 7개월만에 물러나야 했다.
방사성 폐기물 처분 부지에 대한 대안이 없던 때 마침 원자력 연구소가 안면도 부지로 제안하자 우리나라 원자력 분야의 숙원사업을 자타가 인정하는 원자력분야 전문가인 자신이 재임 중에 풀고 싶었던 욕심을 부린 것이 그만「단명 장관」으로 끝나고 말았다.

<안면도 사태로 시련>
역대 장관이 모두 자연과학계 전문가이면서 박사학위 소지자였으나 현 김진현 장관(사회학·경제학)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과학 기술계에 잠재·누적된 온갖 병폐를 혁신하려는 강한 의욕을 지니고 있으나 언론 적인 감각으로 과학 기술행정을 보는 탓으로 너무 비판적이며 전임장관과는 반대로 숲은 보면서도 나무는 못 본다는 지적들도 나오고 있다.
안면도 장관이란 별칭이 붙을 정도로 방사성 폐기물 처분 부지 문제해결에 가장 역점을 두고 있다.
과학 기술 행정은 여러 분야의 기술 요소가 복합된 전문행정인 동시에 기술의 공급과 수요를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종합 행정이다. 또 과학기술을 통해 사회·경제발전을 선도하는 미래 지향적 동태행정이며 민간의 과학기술 개발을 유도하고 창출하는 지원 행정이라는 점에서 이에 맞는 기능이 따라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그러나 현재 과기처는 제한된 예산과 자원 배분 권의 제약으로 종합조정 수행을 하기에는 턱없이 미약하다. 따라서 종합과학 기술 심의 회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도 제대로 집행이 안되고 있기 때문에 과기처 장관직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인식들이 많다.
따라서 국가발전에 요구되는 과학기술 혁신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기 위해서는 정책·집행·자원의 3요소가 조화롭게 구비된 과학기술 행정을 수행할 여건마련이 아쉽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기처를「부」로 바꾸거나 과학기술 행정 책임자를 부총리로 격상하는 문제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 <신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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