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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그룹 총수 新 세계지도] 글로벌 전략 찾는 이건희 삼성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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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글로벌 플레이어’가 된 재벌그룹 회장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 보자. 삼성이나 현대자동차·LG 같은 대기업은 해외에서 올리는 매출이 전체의 60%가 넘는다. 기업인이 ‘나라’를 보는 시각은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인구·구매력·소비 성향·생산기지로서의 가능성 등이 먼저 고려될 것이다. 그러면 ‘뜨는 나라’도 보인다.

4대 그룹 회장들의 머릿속엔 어떤 나라가 먼저 떠오를까?

멕시코의 시멘트 회사인 세멕스(Cemex) 그룹. 이 회사가 주목한 시장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멕시코시티 같은 거대도시 외곽에는 수백만 명의 빈민이 시멘트로 지은 작은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다. 세멕스는 빈곤층이 한꺼번에 건축자재를 구입할 수 없다는 점에 착안해 일주일에 11.5 달러를 내면 10주에 한 번씩 시멘트를 공급해주는 금융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멕시코에서는 8만5000여 가정이 이 프로그램을 이용했고, 세멕스는 세계 3위의 시멘트 회사로 성장했다. 미국 미시간대의 코임바토르 K 프라할라드 교수가 쓴『저소득층 시장을 공략하라』에 소개된 세멕스의 성공 사례다. 프라할라드는 ‘40억의 가능성, 저소득 시장의 개발과 존중’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착취하지 않고도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비즈니스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올해 노벨 평화상을 받은 무함마드 유누스는 어떤가? 그가 1976년 방글라데시의 빈민을 위해 설립한 그라민은행은 3년만 빼고는 내리 흑자였다. 주택 대출 8%, 학생 대출 5%, 거지에 대한 대출 0%라는 파격적인 금리에도 그라민은행은 별로 돈을 떼이지 않는다.

프라할라드와 유누스에게 세계 경제 지도를 그려달라고 하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하루 2달러도 못 버는 빈곤층이 지천인 아프리카와 남미를 먼저 그리지는 않을까? 포화 상태에 이른 선진국 시장보다는 상대적으로 소득이 적은 나라에서 더 큰 매력을 느끼는 것 아닐까? 그만큼 잠재력이 높기 때문이다. 구매력만 갖춰준다면 그만한 시장이 없다는 뜻이다.

‘ 글로벌 플레이어 ’가 된 재벌그룹 회장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 보자. 삼성이나 현대자동차·LG 같은 대기업은 해외에서 올리는 매출이 전체의 60%가 넘는다. 기업인이 ‘나라’를 보는 시각은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인구·구매력·소비 성향·생산기지로서의 가능성 등이 먼저 고려될 것이다. 그러면 ‘뜨는 나라’도 보인다. 이들의 머릿속엔 어떤 나라가 떠오를까?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2006년 말 ‘창조경영’을 미래 글로벌 전략의 키워드로 던졌다. 2006년 하반기 뉴욕·런던·두바이를 차례로 돌면서 이 회장은 임원들에게 창조경영론을 설파했다.

이 회장은 뉴욕에서 삼성의 독자 기술로 미국에 진출한 와이브로와 40나노 32기가 낸드 플래시 개발을 가능케 한 CTF 기술을 ‘창조경영의 산물’로 평가했다.

세계 LCD TV 시장을 선도하는 ‘보르도 TV’도 삼성의 독자 기술이 빚어낸 창조물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세계 무대에서 100년 이상을 살아남는 기업이 손꼽을 정도”라며 “앞으로 창조경영 없이 100년 뒤 삼성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이런 이 회장의 창조경영론은 2007년 글로벌 전략의 실천 지침이 될 것이다. 삼성의 모든 계열사는 이 회장의 창조경영론에 따라 해외에서 ‘창조적 뉴 마켓’ 개척에 나서고 있다. 삼성은 2010년까지 세계 90개 나라에서 새로운 시장을 찾아낸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미 진출해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지역들보다 누구도 진출하지 않은 시장에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낼 수 있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심지어 경쟁사가 진출했다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철수한 시장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공략하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다.

이런 지역일수록 삼성이 시장 지배력을 단기간에 확보해 확실한 브랜드로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는 것이다. ‘뉴 마켓 전략’이 제대로 들어맞은 지역이 바로 러시아와 발트 삼국이다.

볼쇼이의 영원한 스폰서

러시아는 이 회장이 주창하는 창조경영의 실험 무대다. 러시아는 현재 삼성전자를 비롯한 소니·노키아·샤프 등 글로벌 기업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삼성전자는 2007년 초 모스크바 남쪽에 1억 달러를 투자, 생산기지를 건설한다. 이곳에서 2008년 하반기에 LCD TV를 생산할 계획이다. 나중엔 백색가전도 양산해 독립국가연합(CIS) 지역의 생산거점으로 만들 계획이다.

이 회장은 러시아가 시장 창조의 기회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이곳에서 삼성의 첨단기술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한다. 모스크바의 ‘명품 거리’ 안 트베르스카야에 삼성 갤러리를 만들어 DMB·풀HD TV 등을 전시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삼성은 러시아 시장의 주력제품으로 LCD TV를 꼽는다.

휴대전화가 러시아에서 삼성 브랜드를 1등으로 만들었다면, LCD TV는 앞으로 삼성을 프리미엄 브랜드로 만들 것으로 내다본다. 삼성 LCD TV 보르도(R7art)는 모스크바 시민들이 가장 갖고 싶은 가전제품 1호로 꼽힌다.

문화 마케팅도 적극적이다. 삼성전자가 러시아에서 벌이는 문화 마케팅은 감동 수준이다. 삼성전자는 91년 옛 소련 붕괴 후 정부 지원 중단으로 문을 닫을 위기에 몰렸던 볼쇼이 발레단을 지원했다. 98년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했을 당시 유럽·일본 기업들이 지원을 끊을 때도 삼성전자는 후원의 손길을 놓지 않았다. 이 결과 삼성전자는 15년째 ‘볼쇼이의 영원한 스폰서’가 됐다.

발트삼국에서 기선 제압

2006년 10월 삼성전자 윤종용 부회장은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지만 성장 가능성이 있는 미(未)진출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 등 발트삼국을 두고 한 말이다. 발트삼국은 러시아와 동유럽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던 시장이다.

삼성전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발트삼국에 홀로 뛰어들어 2006년 2억2000만 달러가 넘는 매출을 올렸다. 매년 30%가 넘는 성장세를 구가하는 삼성전자는 현지에서 국민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삼성전자 발트법인은 2007년 3억 달러의 매출을 올려 마케팅 법인이 아닌 판매 법인으로 격을 높일 계획이다. 인지도도 매우 높다. 모토로라·소니는 몰라도 삼성전자는 안다.

발트삼국 개척은 이 회장의 창조경영에 따른 조치였다. 2000년대 초까지도 글로벌 기업들의 관심은 동유럽과 러시아에 집중돼 있었다. 삼성은 일찍부터 발트삼국의 잠재성을 봤다. 1998년 직원들을 파견해 시장을 개척했다. 발트삼국은 정부 주도로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든 덕분에 최근 급성장하고 있다. 2006년 7~10%대의 높은 성장률을 달성했고, 1인당 국민소득도 1만2000~1만7000달러에 이른다.

시장도 커지고 있다. 발트삼국의 전자제품 시장 규모는 2005년 15억 달러에서 2008년에는 22억 달러로 급증할 전망이다. 휴대전화 보급률 90%, LCD·PDP TV 시장도 2006년 12만6000대로 성장하며 전년보다 3배 가까이 늘었다.

세 나라 중에서 에스토니아를 주목할 만하다. 이 나라는 적극적인 규제 철폐로 2006년 세계 1위의 기업 하기 좋은 나라로 꼽히기도 했다. 유럽의 최빈국 중 하나였던 발트삼국이 단기간에 유럽의 강소(强小)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두바이에서 창조경영을 배우자고 한 이건희 회장의 언급은 발트삼국에도 적용되고 있다.

이 지역에 대한 삼성전자의 전략은 제대로 먹히고 있다. 러시아 모라토리엄 이후 현지에서 철수했던 소니를 반면교사로 삼아 유통망 확보에 전력을 쏟았다. 이를 통해 울트라 에디션 휴대전화, 40인치 LCD TV 등 경쟁사와 완전 차별화한 프리미엄 제품으로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이 지역에서 판매되는 삼성전자 제품 중 57%가 프리미엄급이다.

삼성의 슬로바키아법인 갈란타공장은 세계 최대 규모의 디지털 TV 생산 단지다. 하루 최고 2200대의 PDP TV, 1500대의 40인치 LCD TV를 양산한다. 삼성전자의 디지털TV가 유럽을 석권하면서 이곳의 LCD TV 하루 생산량도 2005년 8000대에서 2006년 2만 대로 수직 상승했다.

이곳에서는 2명의 직원이 LCD 모니터를 처음부터 끝까지 조립하고 성능 검사까지 하는 셀(세포) 방식으로 작업한다. 이른바 ‘자기 완결형 생산’으로 ‘불량률 제로’ 실현을 위해 도입한 아이디어다. 이 공장은 2007년까지 전 라인을 셀 방식으로 바꿀 예정이다. 이처럼 정형화된 컨베이어 벨트 생산방식을 벗어나 전혀 새로운 생산방식을 창안해낸 것은 이 회장의 창조경영 방침에 따른 것이다.

삼성전자 갈란타 물류센터는 유럽의 전략적 요충지다. 축구장 4개가 들어설 수 있는 거대한 창고로 7만여 대의 TV를 보관할 수 있다. 이 물류센터는 최근 통합물류시스템을 도입했다. 삼성전자는 2007년 말까지 유럽 12개 법인에 흩어져 있는 물류창고 중 영국·스페인 2곳을 제외한 10곳을 모두 폐지키로 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과 갈란타 물류센터에서 DHL로 직접 유럽 각국의 판매점으로 물건을 배송하는 통합 시스템으로 바꾸고 있다. 이럴 경우 평균 재고일이 10일에서 7일 이하로 줄어든다. 유통 기간이 절반으로 단축돼 경쟁사보다 먼저 제품을 배송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이상재 기자

심지어 경쟁사가 진출했다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철수한 시장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공략하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다. 이런 지역일수록 삼성이 시장 지배력을 단기간에 확보해 확실한 브랜드로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러시아 : 모스크바에 1억 달러 투자해 유라시아 거점 생산단지로
발트삼국 : 덩치 작지만 경제 성장률 높은 대표적인 ‘뉴 마켓’
슬로바키아 : 갈란타에 세계 No.1 디지털TV 단지,유럽 물류기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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