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꾼주미경의자일끝세상]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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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하루재 오르는 길로 하늘 가렸던 나뭇잎이 떨어지고 폭포처럼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길을 메우던 시끌벅적한 바위꾼들이 간 데 없으니 새로 떨어진 나뭇잎들도 아직 밟힌 자국 없이 오롯하다. 한바탕 몰아닥친 눈과 추위가 삽시간에 바위꾼들을 몰아내 버렸나 보다. 산에 들어 이 고요함에 한번이라도 빠져 본 이는 세상이 번잡해도 쉬 이것을 잊지 못한다. 하루재 다 올라도 바람조차 없으니, 수은주 뚝 떨어진 날에 나선 등반길이지만 차가운 바위 만질 일이 조금도 걱정되지 않는다.

하루재 넘어서면 으레 향하는 곳이 인수봉이지만, 오늘은 인수봉 빗겨 백운산장 올라, 위문을 통과해 백운대 밑으로 향한다. 한나절 내내 햇볕이 정면으로 드는 남서면을 치올라 북한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백운대 정상에 이르는 신동엽 길, 김개남 장군 길, 녹두장군 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산허리 그늘은 하얗게 쌓인 눈에다 반짝이는 얼음들에 한기가 돌지만, 정작 바위 밑에 도착하니 따뜻한 햇볕을 이기지 못한 눈과 얼음이 물줄기를 이루며 바위골을 따라 흘러내린다. 인적은 없고 깃에 윤이 나는 동구비들만 볕바라기를 하러 나온 바위길을 동료인 Y군과 선등을 주고 받으며 오른다. 바람 한점 구름 한점 없는 대기 속으로 쏟아지는 햇볕에 따뜻해진 등으로 땀이 배어 나오고, 다른 바위길과는 다르게 붙여진 특별한 길 이름에 생각이 머문다.

여기는 마치 동학혁명 전적지인 듯하다. '김개남 장군 길', 김개남이라면 전봉준과 함께 동학혁명을 이끈 동학군 지도자로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뒤 잡혀 효수 당한 비운의 인물이다. 이 길과 벗하여 가는 오른편으로는 동학혁명의 상징인 '녹두장군 길', 왼편으로 에돌아 장쾌하게 뻗은 긴 바위 사면은 동학혁명을 서사시로 그려낸 '금강'의 시인 신동엽 길이다. 이 길들은 1993년, 94년 경원대 산악부 OB인 김기섭씨 등이 개척해 이름 붙였다. 동학의 함성이 남도를 울린 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

김기섭씨가 개척한 길은 설악산에도 많다.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별을 따는 소년들, 몽유도원도, 경원대 리지, 체 게바라 길. 그런데 바로 그 김기섭씨가 얼마 전 인수봉 등반 중 사고를 당해 상.하반신 마비의 위기에 있고, 동료들은 수술비 마련을 위한 모금에 나선 참이라 한다. 중학생 시절 등반을 시작해 평생 가난한 산꾼, 바위꾼으로 살아온 그가 유다른 문학적 감수성으로 꿈꾼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동학의 주인공들이 꿈꿨던 세상은 끝내 오지 않았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뒤 백운대 바위길에 그들의 이름 새긴 이가 있으니, 그 꿈은 아직 계속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에 고여있던 바람인가. 백운대 정상 직전 마지막 피치로 불어오는 바람이 먼 곳에 머물던 생각을 흩뜨려 놓는다. 김개남 장군 길도 끝이 났다. 하지만 부디 이 길에 이름 붙인 그 산꾼의 꿈만큼은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끝나지 않게 되기를.

'바위꾼 주미경의 자일 끝 세상' 연재를 오늘로 마칩니다.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주미경 등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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